시읽기
律呂集89 별채 한 채 짓다/정진규(鄭鎭圭)
김선자
2023. 4. 15. 16:34
律呂集89 별채 한 채 짓다
정진규(鄭鎭圭)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이 오는 틈, 거기 올가을엔 겨울이 올 때까지 온몸으로 들어가 앉을 채비를 하고 있다 매미는 칠 년이라는데 그쯤이야 못견디겠나 늘 이쪽과 저쪽에서만 만나왔기에 너와 나 사이 벌어진 틈, 그걸 한생쯤 되어서야 깨달은 셈이다 늘 한쪽이 비어 있었으니 한 채 집을 지었다 할 수 있겠느냐 끝나고 있는 연꽃, 이우는 연꽃과 맺히는 연밥, 여무는 상부의 속도와 거리를 조절할 줄 알게 되었다 거기서 별채 한 채 짓고 있다 안채 바깥채 별채가 하나 되어야 비로소 문패를 내어달 수 있느니 어제는 이삭 패는 논배미 논두렁에 퍼질러 앉아 햇살 가닿는 이삭의 꼭두에 오래 손 데이다가 내 손이 익는 살 냄새를 맡았다 깊게 데었다 간섭하지 않으시니 거기까지 갈 수 있었다 외로움을 터득했다 한 채 별채가 지어졌다 내일은 뒤꼍 감나무의 가을 별채를 만나러 갈 것이다 화안하게 등불 켜들고 있는 감알들이 내게로 건너오는 별채들을 만나러 갈 작정이다
-《문학사상》, 2012,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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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鄭鎭圭) 시인
193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1960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다. 현재 《현대시학》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