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없는 시대 외 2편/황동규
이별 없는 시대 외 2편
황동규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
허허.
마른 국화 몇 잎
황동규
다 가버리고, 남았구나
손바닥에 오른 마른 국화 몇 잎.
짧은 가을이 갔다.
떨어진 나뭇잎들 땅에 몸 문지르다 가고
흰머리 날리며 언덕까지 따라오던 억새들도 갔다.
그대도 가고
그대 있던 자리에
곧 지워질 가벼운 나비 날갯짓처럼
마른 국화꽃 내음이 남았다.
우리 체온이 어디론가 가지 못하고 끝물 안개처럼 떠도는 골목길에
또 잘못 들어섰다든가
술집 주모 목소리가 정말 편안해
저녁 비 흩뿌리는 도시의 얼굴 그래도 참을 만하다든가
그대에게 무언가 새로 알릴 거리 생기면
나비 날갯짓 같은 이 내음을 통해 하겠네.
나비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가서 폭풍을 낳는다고도 하지만
가을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지는 마시게.
어둡고 더 어두운
황동규
흔히 그렇지만 머리 아플 때 진통제를 삼키면
잠시 후 신경에 얇은 막이 덮이고
통증이 무뎌지고
마음의 자전(自轉)이 늦어진다.
모차르트는 그저 모차르트
만나는 사람은 그저 만나는 사람
긴한 감각들이 전정(剪定)당한다.
어쩌지, 산책길에 달려드는 벌들이
공손해진다.
뇌를 쿡쿡 찌르는 머리 그대로 쳐들고
바다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친구와 술잔을 나눈다.
우리 대화 저 앞에 해, 환한 구리거울 같다.
드디어 거울이 끓고 바다가 끓고
통증이 끓으며 잦아든다.
거울이 한 번 더 끓으며 바다를 물들이고 사라진다.
술 한 번 마실 때마다
뇌세포가 몇 마지기씩 죽는다고 하지만
뇌세포 다 살려갖고 죽어야 맛인가! 세포들아,
터진 솔기와 실밥을 감추지 못하는 뇌세포들아,
세포 수 가난한 나를 용서 말아라.
용서받는 것은 어둡고, 안 받는 것은 더 어둡다.
술상 옆, 개울에도 못 끼는 실 도랑물
어둠 속에 바다를 열고 들어간다.
—시집『사는 기쁨』에서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봉준(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왕 뒤에 큰 왕이 있고큰 왕의 채찍!마패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무식하게 무식하게.
《현대문학》196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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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와 대학원 졸업,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수학.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열하일기』『삼남에 내리는 눈』『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몰운대행』『미시령 큰바람』『외계인』『버클리풍의 사랑노래』『꽃의 고요』『겨울밤 0시 5분』『사는 기쁨』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