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외 4편/이기철
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외 4편
이기철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한 번도 바라보지 못한 짐승들이 즐거워질까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아직 만나지 못한 삶들도, 까치도 즐거워질까
급히 달려와 내 등 뒤에 連坐한 시간들과
노동으로 부은 소의 발등을 위해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를 빌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날들을 노래하고 싶다.
나이 먹기 전에 늙어버린 단풍잎들은 내 가슴팍을 한 번 때리고
곧 땅속으로 묻힌다.
죽기 전에 나무둥치를 감고 타오르는 저녁놀은
地上의 죽음이 저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치는 걸까
살이 연한 능금과 배들은 태어나 첫 번째 베어 무는
어린 아이의 갓 돋은 치아의 기쁨을 위해 제 살을 바치고
群集으로 몰려오는 어둠은 제 깊은 속에다 아직 밤길에 서툰 새끼 짐승을 위해
군데군데 별들을 박아놓았다.
우리가 아무리 높이 올라도
검은 새가 나는 하늘을 밟을 수는 없고
우리가 아무리 정밀을 손짓해도
정적으로 간 흰 나비의 길을 걸을 수는 없다.
햇빛을 몰아내는 밤은 늘 기슭에서부터 몰려와
대지의 중심을 덮고
고갈되기 전에 바다에 닿아야 하는 물들은
쉬지 않고 하류로 내려간다.
病들도 친숙해지면 우리의 외로움을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산과 들판에 집 없이도 잠드는 목숨을 위해
거칠고 무딘 것들을 달래는 것이 지혜의 첫걸음이다.
달콤하지 않아도 된다 내 부르는 노래가
발시린 짐승의 무릎을 덮는 짚이기만 한다면,
향기롭지 않아도 된다 내 부르는 노래가
이슬 한 방울에도 온몸이 젖는 풀벌레의 날개를 가릴 수 있는
둥글고 넓은 나뭇잎이기만 한다면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2
언덕 너머에 집이 있고 길 건너에 물이 있다
배추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어져서는 안 된다
인간의 말은 너무 난해해
소들은 풀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귀를 대고 산다
안 보이는 곳에서 샘물이 솟고
벌레들은 해 지기 전에 가시나무 울타리에 집을 짓는다
가 본 길만 길이 아니다, 어둠 속으로 벋은
가보지 않은 길은 얼마나 깊고 싱싱한가
그곳에 흩어진 마음 조각들이
저들끼리 모여서 노래가 된다
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3
엄숙한 지붕을 수도원을 지나, 가끔 두근거리며 생각의 알맹이를 싸서 부치는 우체국을 지나, 수많은 포스터와 현수막이 나부끼는 거리를 지나, 쌓아놓은 연탄과 사과궤짝의 가게를 지나, 울타리 안에 나팔꽃이 피어오르는 담벽을 지나, 나는 간다. 빈 깡통과 팩에 든 싱싱한 과즙을 빨아먹고 버린 빨대를 밟고 햇볕 드는 창가로 고양이가 뛰어오르는 광경을 보며 거대한 연방이 무너져도 아직 기저귀를 빨고 밥솥에 불을 지피는 손이 거친 아낙들의, 낮은 처마의 집들을 지나, 나는 간다. 그 아낙들의 양초, 통조림, 밀가루, 성냥을 찾아 부엌으로 갈 때 부를 노래 하나만이라도 나는 이 地上의 전등불 아래 남겨야 한다. 내일 아침엔 물방울꽃이 발 아래 피어날 것이라고, 아침마다 햇살을 한 웅큼 베어무는 낯이 흰 新生의 아이들을 위해 젊고 튼튼한 말을 골라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
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4
오늘 움돋는 잎처럼 피어나는 아이들은
봄을 거쳐 여름의 궁전으로 천천히 入城해갈 것이다
봄이 따뜻하고 여름이 뜨거워 산에 들에 피 토하듯
망울을 터뜨리는 꽃을 보아라
얼마나 뜨겁게 흙을 껴안으며 검은 흙에서 붉은 꽃이 돋을까
땅덩이 일만 군데서 샘물이 솟아 사람과 너구리가 먹고 남은 물 흘러
바다에 이른다
피라미들의 작은 헤엄에도 물살이 일어
작은 물살에도 바위가 깎이고
솔잎에 부는 바람이 피리 된다
정구지꽃을 어루고 오는 들판의 바람 한 자락이
일만 여인의 치마가 되고
해뜨기 전의 동쪽 하늘 한 자락이
십만 장정의 바지가 된다면
내 노래는 피륙이 되어 추운 사람들의 외투가 될 것이다
생성의 들판에서 종다리가 날아오르고
그루터기마다 알을 품은 철새들
우리 일하던 손으로 수천 葉脈의 거문고를 타면
마침내 地上은 거대한 교향악의 바다가 될 것이다
그때 지상의 마지막 한 사람은
우리가 하늘에 띄운 노래를 바다 밖에서 들을 것이다
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5
내 지상에서의 70년은 아름다웠다고
어느 날 내 낡은 일기장은 쓰리
푸른 시금치 잎을 먹고
안개 걷힌 들길을 걸어간 일 황홀했다고
아직 먼지가 되지 않은 참회록은 쓰리
황폐한 길과 건물들 사이에서
슬픔으로 반추하던 고뇌들이 날아가 수정이 되었다고
고통의 술잔에 입술을 대며 바라본 하늘은 푸르렀다고
내 한 사람의 이름 앞으로 보낸 편지는 말하리
부르기만 해도 입 안에 초록빛 물이 고이는 풀꽃의 이름과
가끔 놀빛이 차양처럼 문앞에 걸리던
걸어온 만리길은 약속처럼 설레었다고
내 흙 묻은 구두는 외치리
그러나 지상의 노래들의 절반인 고통이여
기록 없는 마음의 병력이여
네가 괴로움에서 즐거움까지 닿는 데는
또 몇 번의 가을이 바뀌어야 하나
이기철 시집『地上에서 부르는 노래』(문학과지성사,1993)
<제1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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