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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있다/로버스트 A. 존슨 지음-모순을 초월한 역설의 위대함 2

김선자 2024. 5. 17. 16:04

모순을 초월한 역설의 위대함 2

 

오른쪽 목록에 작성된 실질적인 가치에 관해서는 논쟁이 별로 필요없을 것이다. 이기는 것은 좋은 것이고 받는 것은 유리하다. 높은 수입은 멋진 것이며, 먹는 것 그 자체는 삶이며, 행위를 함으로써 뭔가가 생산된다. 돈을 버는 것은 곧 책임을 다 한다는 증거다. 또 소유를 통해 공동체와 개인은 재산을 축적한다. 소유는 곧 안정을 의미하며 바쁜 것은 가치가 있다. 섹스는 우리 삶의 기반이고 단언은 생산적이며 의존할 만한 것이다. 자유는 미국 정부 수립의 동기였고 선택은 곧 자유인을 위한 신성함이다. 권력은 효율성과 동일한 의미이고, 정신을 집중시킨 의식은 미개한 사람의 몽상에 대한 해독제가 된다. 명료함은 중요하며 많은 것이 좋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실질적 가치 종교적 가치

승리 패배

수입 지출

음식 단식

행위 존재

버는 것 주는 것

사 모으는 것 가난한 이에 나눠주는 것

부의 축적 청빈

활동 휴식

섹스 정결

단언 관찰

자유 권위에 대한 복종

선택 의무

민주주의 독재

이성적 의식 명상적인 의식

냉정 황홀

초점 비전

많은 것이 좋다는 믿음 작은 것이 좋다는 믿음

 

서구사회에서 이런 가치들은 '우량주'로 간주되며 논쟁거리조차 안 되는 기본적인 것들이다. 서구 문화는 이런 가치를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 덕목으로 인해 최상의 일들을 성취해내었다.

그러나 다른 목록에 작성된 종교적인 가치는 어떠한가? 현대문화의 토대는 그리스도교인데 우리는 일요일마다 종교적 가치에 대해 듣는다. 설교 때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고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한다. 또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단식을 권한다. "누가 여러분의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내어주십시오", "복되어라, 가난한 이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러나 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신봉하든 안하든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이런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우리의 언어, 문화, 신화 속에 내재되어 있다. 헌법은 자신의 방식을 택할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토대로 제정되어 있지만, 종교적 가르침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위해 공헌하라고 한다. 종교에서는 자유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에 따라 지시를 내린다.

 

아마도 미국화폐만큼 이런 모순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화폐에는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을 없애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나는 여러 차례 인도를 여행한 바 있는데, 그중 한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인도라는 신비한 땅과 힌두의 명상, 불교의 명상수련을 경험하고 막 돌아온 직후라 나는 여전히 종교적인 태도와 인도 땅의 신비함으로 충만해 있었다. 인도에서는 신의 의지란 늘 한 가지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만일 이 길 아니면 저 길이란 식의 선택을 이야기한다면 아직 자기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추구하는 바가 명백할 때는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절대적인 식별이 가능하다. 신의 마음은 통합되어 있고 이분법을 모르기 때문에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친구한테서 온 편지를 읽으면서 인도에서의 이 가르침을 소화하기 위해 고민하게 되었다. 친구에 따르면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다양한 선택을 제공하도록 헌신해야 한다." 이처럼 동서양의 가르침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내가 관찰한 것은 나의 인도친구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평화롭게 사는 데 반해 결정을 내리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는 내 미국친구들은 훨씬 경직되어 있고 걱정이 많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덕목은 그 반대되는 것으로 인해 타당성을 지닌다. 어두움이 없는 빛은 아무 가치도 없다. 여성성이 없는 남성성이란 의미가 없다. 버림 없이 돌봄의 가치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실은 항상 다른 두 대극적인 쌍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든 실체와 조화를 이루려면 이 대극을 견뎌내야 한다.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는 허용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중성이란 신비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이것을 할 때마다 즉각 저것도 하게 된다. 이것이 실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이 명백한 모순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모든 신경증적인 해리와 심리학적 문제의 바탕이 되는 본질적 물음이다. 우리가 적절하지 못한 질문 속에 헤매게 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경증적 마비상태에 빠질 것이다. 어떨 때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못하게 될 것이다. 행동으로 옮길 수도, 그렇다고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무수한 사람들이 당면해 있는 상태이며 이들이 겪는 고통은 극심하다. 이것을 시작하면 곧 저것이 등장해서 우리를 죄책감에 빠뜨린다. 우리는 도망갈 구멍이 없는 곳에 갇혀 끝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즐거운 일을 선택하면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 기분을 망친다. 해야 하는 일을 하려고 들면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관해 몽상을 하게 되어 참고 일하려던 자제심이 엉망이 된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9번 교향곡의 스케르초로 표현했다. 음악이 돌고 돌아 해결점이 없다가, 마지작 악절에서 풀려나와 기쁨의 환호를 지르면서 끝을 맺는다.

혹시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이 속임수를 써서 23이 같다는 것을 증명한 적이 있는가? 칠판에 증명을 해놓았는데 그때 오류를 찾아낼 만치 머리 회전이 빠른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그 속임수는 증명을 하는 동안 0으로 나누기를 한 데 있었다. 0으로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자연히 잘못된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우리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심리학 방정식을 만들어서 수학선생님의 증명과정에서처럼 오답을 얻곤 한다.

앞서 내가 나열한 두 상반되는 목록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존재한다. 그 둘을 나눈 것은 23은 같다는 것만큼 잘못된 증명이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심리 구조 자체가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구조는 붕괴되기도 한다.

우리가 범한 오류는 종교적이란 단어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오류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오류가 없었더라면 삶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울까? 종교religion란 단어는 라틴어로 '다시'라는 의미의 re, '연결되고 묶고 다리를 놓는다'라는 의미를 지닌 ligare에서 유래되었다. '끈을 동여 묶다'라는 뜻을 지닌ligature도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종교란 '다시 함께 묶는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결코 대극이 되는 쌍의 한 영역으로만 제한해서는 안된다. 예전에는 논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속적인 태도와 종교적인 태도를 대비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틀을 사용한 것이며 대다수 인류가 신경증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바탕이다. 어떤 행동은 세속적이고 다른 행동은 신성하다는 생각은 언어를 아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행위, 혹은 특징들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리를 놓고 치유를 하는 종교적 통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두 대극을 회복하고 화합하는 길이다.

종교는 큰 고통을 초래해온 분리를 넘어서게 하고 대극에 있는 둘을 다시 묶어주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서로 반대편에 있어 고통을 가중시키는 모순에서 벗어나, 반대되는 두 개념을 동시에 즐기면서 둘 다 동등하게 존중할 수 있는 역설의 영역으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이럴 때 비로소 은총의 가능성이 주어지는데, 여기서 은총이란 모순을 영적으로 경험하여 서로 대극을 이루는 요소들보다 더 커지는, 전체가 응집되는 정신적 체험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23이 같다고 증명하는 식의 오류와 같다. 서로 반대되는 쌍의 한쪽을 종교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완전한 실수다. 종교란 단어는 합성synthesis의 영역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종교는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단어가 치유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치유하고, 연결하고, 결합하고, 교량이 되고, 다시 함께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닌 신성한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