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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있다/로버스트 A. 존슨 지음-그림자 감싸안기

김선자 2024. 5. 17. 16:11

그림자 감싸안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다음 단계의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

나는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로 이 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역설과 그림자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역설은 모든 면에서 그림자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고, 그것을 가치 있고 위엄있는 자리로 끌어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고귀한 화합의 장인 역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는 것은 곧 영성을 체험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서와 세계 신화는 공통적으로 가장 평범한 장소나 사건에서 신성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신화적으로 표현하면 가장 값비싼 진주는 일상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어느 집이든 지붕만 걷어내면 신들의 드라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누구의 생애이든 지붕을 벗겨내보라. 그리하면 역설을 발견할 것이다. 역설은 종교적 삶, 즉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위대한 비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해본 적이 있는가? 이때 우리는 사랑에 대한 자기 확신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의 윤리적·도덕적 감각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런 노력이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자기Self가 등장하는 무대를 마련하게 된다.
주어진 임무를 당장 수행할 것인지 좀더 오래 빈둥거리며 몽상을 계속 즐길지 갈등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이쪽과 저쪽 어느 한쪽도 신성하지 않다. 신성한 자리는 정확히 이 둘사이에서 발생하는 역설 안에 존재한다.
상담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단히 무안해하고 괴로워하면서 충돌하는 가치들을 꺼내놓는다. 이들은 대개 해결책을 원한다. 그러나 해결책 대신 역설을 감당할 만한 의식을 부를 수 있다면 더 커다란 것을 얻게 될 것이다.친구 하나가 취리히에 있는 마이어Meyer박사에게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그 박사는 말 끝마다 "예ja"라는 한 음절로 대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고상한 영국 신사인 내 친구는 용감하게도 자신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지 털어놓았다. 눈물이 터져 나와 울면서 소리쳤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어요." 이에 대해 마이어 박사는 "예, 좋아요. 이제 뭔가 일어날 거예요"라고 반응했다. 이는 입에 쓴 약이지만 상황을 참아낼 정도로 충분히 강한 사람에게는 옳은 답이다.
멈출 수 없는 총알이 관통할 수 없는 벽에 가닿을 때,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자아ego는 용기는 있되 윤리와 도덕성이 취약한 사람의 특징이다. 현재 우리시대에 걸맞게 영웅주의를 재정의하자면, 영웅이란 역설을 감당하는 능력의 소유자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여러분을 자기중심에서 멀어지도록 만드는데, 그 이유는 행위doing와 존재being 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이콜로지 투데이>의 초기 표지에는 대단히 도발적인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저 뭔가 하려 들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라." 이 표현이 농담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불교적 표현은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의식적인 기다림을 통해 역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때 자아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아보다 더 큰 뭔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