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자의 시 1
느림의 美學/김선자
김선자
2022. 10. 12. 16:25
느림의 美學
김선자
달팽이 한 마리가
산수유나무 그늘을 지나간다
별빛 둥글게 걸어 둘 집으로 간다
걸어오는 동안 참았던 말들
미끄덩거리는 침으로 흙에 개어
갈라진 벽에 바르겠다고
목숨 밀며 간직해온 소리가 하루를 건너간다
햇살 아래에서 갑각의 껍질이
어느 날 두꺼워지는 건
무서운 변신, 달팽이가 경주에서 토끼를 이기고
만세! 두 손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길이 없어도 가야하는 달팽이의 사랑스런 몸짓
혓바닥 깨물던 몸의 이슬은 지상에서 가장 순수한 고전
엎드린 들꽃에게 외로워 말라고
십자로에서 내뱉던 덤덤한 위로
달팽이 등은 마법의 그림자로 번쩍인다
수직의 길도 수평의 길도 지나와
경주에서 토끼를 이긴 달팽이에게는
나뭇잎조차 축하하듯 나부낀다
느릿느릿한 나선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