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기
행간/이기철
김선자
2024. 7. 24. 23:28
행간
이기철
행간을 돌아 나오는 동안 가을이 저물었다
오후 여섯 시의 행간은 정원보다 깊다
원시(原始)로 가려면 낙엽신발을 신어야 한다
한 번도 휴식해 본 적 없는 태양과
잠을 모르는 지구가
고대의 말소릴 잊지 않고 여기까지 데려왔다
소리의 칸칸을 지나면 몸 안의 각지(地)에 파도가 인다
그 지명들을 내 편애의 언어로 불러내면
불현듯 고왕국으로 가는 차표를 사고 싶어진다
진번 임둔으로 가는 매표구는 어느 페이지에 있을까
바빌론 카르타고로 가는 선편(便)은 어느 쪽에 있을까
목차를 매표하는 동안 참깨씨가 재재발리 저녁 종을 친다
설화의 사랑에 열광했던 낙랑을 생각하며
나는 비로소 페이지를 닫고
바이칼로 가는 길을 묻는다
가위로 자른 저녁놀이 색실처럼 풀려 어깨에 걸린다
먼 곳은 멀어서 더욱 그립다
- 시집『영원 아래서 잠시』(민음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