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기
불행에겐 이런 말을/이기철
김선자
2024. 10. 18. 18:23
불행에겐 이런 말을
이기철
불행도 자주 만나면 친구가 된다
더운물로 그의 발을 씻겨주고 그의 몸을 타월로 닦아주면
면내복처럼 유순해진다
한 열흘은 불행하고 단 하루는 행복하자
조금씩 내리는 찬비처럼 내게 오는 불행이여
내 새 옷 한 벌 사 줄게 채소 같은 행복 한 잎만 들고 오면 안 되겠니
신장에도 장롱에도 책상에도 지붕에도 이슬같이 내리는 불행
그러나 내가 그를 찾아가 이마를 짚어주면
불행도 부츠처럼 편안해진다
나는 서른까지는 불행하고 마흔은 행복하고
쉰은 조금씩 아끼며 불행하고 예순은 조금씩 보태며 행복하고 싶었다
철조망 안에도 햇볕이 놀듯 활짝 불행을 꽃 피워
행복의 열매를 맺고 싶었다
먼 길 걷는 사람은 처음부터 불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그와 함께 걷는 신발 소리가 행복을 맞으러 가는 발자국 소리임도 알아야 한다
나는 피하지 않고 그를 만났고 그와 밥 먹고 그와 잠자면서
마침내 그의 머리카락 냄새 속옷 냄새까지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그의 뒤를 닦아주고 그와 입도 맞추었다
불행은 행복의 언니에게 안기면 스스로 행복의 누이가 될 줄도 안다
<현대시학> 2012. 11.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