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기

제6회 백석 문학상 - 바다와 호수 / 이시영

김선자 2024. 10. 18. 18:49

바다 호수

 

 이시영  


호수

갈매기들이 한강까지 날아와 쉰 적이 있다
여기가 바다인 줄, 바다의 큰 호수인 줄 알고.



목련나무가 한겨울에 솜털 폭풍을 달았다
여차하면 하늘을 향해 발사하겠다는 듯이

8.15

기념식에서 돌아온 독립유공자 유족이 올해도 어김없이 비밀 천막 문을열고 들어간다
조국의 하늘은 저리 푸르건만

아침

너는 왜 여기까지 날아와 새가 되었나?
동몽골 고원의 푸른 草地에 내려앉아 아침 부리를 닦고 있는 작은 참새여

즈가버지

전라도 여인들은 남편을 부를 때 꼭 즈가버지라고 했다. 즈그(that) 아버지라는, 자식을 매개로 한 일종의 간접호칭인 셈인데 수많은 즈가버지들은 또 즈거매들의 목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어 회관 같은 데 한꾸네 모여 있다가도 “즈가버지 여기 짬 보시오 이” 하면 “왜 그려?” 하면서 그 중의 한 사내가 진짜 고개를 쏘옥 내밀고 나오는 것이었다.

취미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남산 중앙정보부, 그곳에 들어가 신원진술서 취미란에 ‘식사’라고 썼다가 치도곤을 당한 유쾌한 학생이 있었다. “뭐 이 새끼 취미가 식사라고? 이 새끼 이거 순 유물론자 아냐?” 그 일로 그는 조사도 받기 전에 밤새도록 수사관 두 명에게 돌아가며 맞았다는데, 가난이 원죄이던 시절 그는 런닝구 바람에 책을 끼도 신당동에서 동숭동까지 걸어다닌 강골의 고학생이었다.

베스트셀러 시인들을 위하여

누구나 다 한때는 순결한 영혼들이었다. 독자들이 그 영혼에 입 맞추자 그들은 배부른 돼지들이 되어 부끄러움도 잊고 제 분홍 머리들을 서점의 진열대 위에 올려놓은 채 호호 웃고 있으니 우리가 이제 싸워야 할 대상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바로 저 상업의 노예들인지도 모른다.

* ‘호호 웃는 돼지머리’ 이미지는 이성복 시집 『아, 입 없는 것들』 139쪽에서 차용  

수상시집
바다와 호수
이시영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