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기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육근상

김선자 2025. 1. 31. 19:51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육근상


늦더위에 술 생각이 없오
술 생각 없으니 그리움도 오지 않소
피마자 이파리만 흔들려도 울컥 거리며 피어오르던
처마끝 수세미 꽃이  황달처럼 애처롭더니
이제 피는지 지는지 모르겠고 그늘만 찾아다니오

입추 지났으니 더위 물러갈 것이오
새벽이면 이불 끌어당기는 손이 간사스럽기도  하여
자다 말고 일어났더니 대추나무 걸린 달덩어리가 월식을 하오
월식 날에는 보길도 깨돌 밭에 앉아
어린애  이빨 가는 소리 나 듣고 있으면 좋은데
산 다랑이 깔막진  동네에도  생물 산다고
달도 없는 컴컴한 마루에  귀뚜리미가 우오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별소리 다 하며 우는
저 귀뚜리미도 그리운 것 하나 없는 듯 하오

귀뚜리미 소리 들으며 새벽 보내고 나니
호수에 또 달이 차오르오
달을 두 번씩이나  보고 있어도 오지않는
내 그리움 얼마나 사무치는지
물결마저 잔잔하게  출렁이며 슬피 우오

ㅡ육근상 시집 <우술 필담>, 솔,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