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연초당과 백매원 -매향 가득한 유식과 강학의 공간-
한강정사에서 꼬박 10년을 보낸 정구는 1583년 창평산에서 남쪽으로 1리 남짓 떨어진 회연으로 옮겨와 초당을 짓고 생활하게 된다. 이후 정구는 1591년 사창으로 이거하기까지 약 8년 동안 이곳에서 매우 바쁜 삶을 살며 학문을 더욱 심화시키고 경륜도 쌓아가게 된다. 이이가 ‘이이․성혼․정구의 3인공조’를 통해 동서 내지는 영남․기호의 보합을 제의해 온 것도 이 때였고, 동복․함안 등지의 수령을 지내며 해당 고을의 읍지를 편찬하고, 창원 땅에 관해정(觀海亭)의 터를 잡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에 못지 않게 정구는 학문에도 더욱 열정을 보여 1585년에는 ?소학? 및 4서 언해 교정청의 낭청으로 발탁되어 상경한 바 있고, 1589∼1590년 경에는 생도들을 데리고 ?심경?, ?근사록?의 강론에 매우 공을 들였다. ?한강집?에 보이는 ‘계회입의(契會立議)’, ‘월조약회의(月朝約會儀)’, ‘통독회의(通讀會儀)’, ‘강법(講法)’ 등이 이 시기에 문생들을 위해 만든 교육지침들이다. 여기서 정구가 살던 당시 회연의 상황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① 회연은 창평에서 남쪽으로 1리 쯤에 있다. 선생께서 그곳 천석(泉石)의 빼어남을 사랑하여 작은 서재를 짓고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방(房)을 불괴침(不愧寢), 창(窓)을 매창(梅牕), 헌(軒)을 옥설(玉雪)이라 이름했으며, 또 죽유(竹牖), 송령(松欞) 따위의 액호가 더 있었다. 백 그루의 매화와 대나무를 정원에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했다.
② 선생은 중년에 사촌(沙村) 구기에서 양장(羊腸)으로 살 곳을 옮겨 잡았는데, 한강정사와는 몇 리 쯤 떨어져 있었다. 가야산의 한 지맥이 북쪽으로 뻗어가다가 동쪽으로 굽어 가천(伽川)에 이르러 멈춘 곳인데, 천길 벼랑이 시내 위에 우뚝 솟아 있다. 회연(檜淵)이라 불리는 이곳은 수석(水石)과 연하(煙霞)의 정취가 그 일대에서는 으뜸이었으므로 마침내 전토를 사들여 살게 되었다. 연못 위에 몇 칸의 초당을 세우고 옛 이름으로 편액을 하였으며, 정원에는 백여 그루의 매화를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했다. 모두 난리 중에 불에 탔고 뒤에 다시 복설하였는데, 창과 문은 오로지 옛 제도에 따랐다. 실(室)을 불괴침(不愧寢), 창(牕)을 매창(梅牕), 헌(軒)을 정관(靜觀)이라 이름했으며, 또 죽유(竹牖), 송령(松欞)이라 쓴 액자를 문미 사이에 걸었다.[李堉]
창평산과 마찬가지로 회연도 세전된 것이 아니고 정구가 매입한 땅임을 알 수 있다. 인용문 ②에 표현된 ‘천길 벼랑’이 곧 봉비암(鳳飛巖)인데, 그 아래에는 초당 쪽으로 흘러드는 소(沼)가 있어 예전에는 이곳을 회연(回淵)이라 했으나 뒤에 회연(檜淵)으로 글자를 바꾸어 초당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견해가 있다.
위 두 기록을 종합하면, 회연초당은 비록 초가집이었지만 방(房)․창(窓)․헌(軒)에 걸린 편액에서는 정구의 고상한 정신세계가 응집되어 있었고, 봄이면 뜰 가득 매화가 피는 소박한 학자의 거처였던 것이다. 회연을 노래한 것으로서 현재 서너 작품이 전하는데, 다른 곳에 비해 매우 많은 편이다. 이것은 회연에 대한 강한 애착의 반증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들 작품은 회연은 어떤 곳인지, 여기서 진정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회연이 좋은지를 설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변변찮은 산 앞에 자그마한 초당이라 小小山前小小家
동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어난다 滿園梅菊逐年加
게다가 구름 냇물 그림같이 꾸며주니 更敎雲水粧如盡
세상에서 내 생에 누구보다 호사로워 擧世生涯我最奢
가천은 나에게 깊은 인연 있거니 伽川於我有深緣
저 좋은 한강에다 회연까지 얻었노라 占得寒岡又檜淵
흰돌이요 맑은 시내 종일토록 즐기나니 白石淸川終日翫
세간의 무슨 일이 이내 마음 스며들까 世間何事入舟田
헛되이 보낸 세월 이내 학문 걱정되어 深憂拙學久因循
계획 다시 세워볼까 단단히 다짐했소 鞭策規模擬更新
애정 깊은 벗님네들 정중히 사절하니 珍重賓朋相愛厚
한가로운 행차는 자주 하지 말았으면 閑時命駕莫敎頻
도회지 멀리 막히었고 遠隔城市
선영 가까이 모신 자리 近陪先壠
뒤로는 구릉을 등지고 後負丘陵
앞에는 늪지와 통하며 前控池沼
오른쪽은 마을과 잇닿았고 右接閭閻
왼쪽은 맑은 연못 임하였네 左臨澄潭
푸른 언덕 흰바위요 蒼崖白石
울창한 숲 무성한 풀 茂林豐草
나무하고 소먹이기 거칠게 없고 樵牧兩便
나물 캐고 낚시하기 모두 좋다네 採釣俱宜
뭇 산이 에워싸고 羣山環擁
두 물길 합쳐 흘러 兩水交流
산등성이 기묘하고 岡阜奇絶
들판 트여 너른 자리 郊原平曠
남향에다 물길 등져 面陽背流
겨울에 다습고 여름에는 시원한데 冬溫夏涼
토질이 촉촉하여 벼농사 적합하고 濕宜禾稼
들 넓어 뽕무나며 삼 가꾸기 좋다네 衍合桑麻
남촌 농부 만나 보고 南村訪索
서산 신선 찾아가네 西嶽尋眞
결국 정구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회연으로 왔고, 그래서 그는 손님의 방문을 정중하게 사양했던 것이다. 또한 정구는 초당에서 누리는 산수조차도 사치스럽게 여겼는데, 풍류의 절정이며 안분의 극치라 하겠다.
그렇다고 정구가 회연에서 오로지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회연신천20의(檜淵新遷二十宜)’에서도 표현되어 있듯 때로는 이따금 문인들과 낚시도 했고, 때로는 들에 나가 농부들을 만나기도 했다.
선생께서 회연에 계실 때 상룡이 여러 벗들과 함께 어느날에 모여 낚시를 하기로 약속했다. 약속 날이 되자 폭우가 쏟아져 개울물이 범람하여 여러 벗들이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날이 갠 뒤에 선생께 갔다. 선생께서 ‘모일에 제군들이 모이기로 했다는데 왜 가지 않았는가’며 물으셨다. 내가 비 때문이었다고 하자 선생께서 ‘벗들과의 약속을 풍우 때문에 그만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물론 이 기록은 정구의 ‘붕우관’ 또는 ‘약속관’을 언급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정구를 비롯한 그 문인들이 회연에서 낚시를 하며 여가를 선용했을 알 수 있다.
한편 정구가 애지중지 했고, 또 회연초당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백매원에는 최영경(1529∼1590)과 관련된 일화 하나가 전해오고 있다. ?한강연보?에 의하면 최영경이 회연을 방문한 것은 1589년이었다. 이 해는 정구가 회연경영에 착수한지 6년 째 되던 해고, 최영경이 죽기 한 해 전이었다.
일찍이 한강의 백매원을 들렀는데, 때는 2월이라 매화가 만개하였다. 선생이 아이를 불러 도끼를 가져오게 하고는 뜰에 가득한 매화를 찍어 넘어뜨리라 하니 온 좌중이 놀라 서로 만류하였다. 선생이 웃으면서 그만두게 하고는 ‘매화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눈 덮인 골짜기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모든 꽃들보다 먼저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지금은 도리(桃李)와 더불어 봄을 다투니 어찌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이 막지 않았다면 매화가 찍어 넘어짐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고 했다.
물론 최영경의 분개는 기축옥사로 대변되는 당시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야기된 것이지만 하마터면 이 때 백매원도 사라질 뻔 했던 것이다.
이후 정구는 1591년 회연에서 10리 떨어진 사창으로 이거하였고, 회연초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만다. 그 후 정구는 1605년 회연초당을 복설하는 한편 초당의 동쪽에 망운암(望雲庵)을 아울러 건립했는데, 1간 규모의 초가집인 망운암은 선대를 기리는 추념의 공간이었다. 이후 회연은 한강학파의 본거지로 인식되어 정구 사후에는 이 곳에 회연서원이 세워 졌다.
<그림 3>에서 가운데에 우뚝 쏟은 절벽이 봉비암이고, 그 왼쪽에 소용돌이 치고 있는 소(沼)가 바로 ‘회연(回淵: 檜淵)’이다. 왼쪽에 보이는 비석은 ‘한강신도비’이고, 그 뒷 쪽에 보이는 건물이 회연서원이다.
?한강집?에는 봉비암의 존재가 보이지 않지만 ?경산지?에 따르면 이 바위가 봉비암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신도비가 세워진 부근이 백매원의 옛 터로 보이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당초 신도비는 정구의 산소가 있던 창평산 아래에 건립되었으나 1663년(현종 4) 묘소를 인현산(印懸山)으로 이장할 때 회연서원 앞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정구의 이장지인 인현산은 성주의 진산으로 예로부터 총택(塚宅)의 조성을 금했는데, 정구는 이 곳에 묻힌 최초의 인물이다.
그리고 ‘한강신도비명’은 신흠(申欽)이 짓고, 김세렴(金世濂)이 본문의 글씨를 섰고, 김광현(金光炫)이 전액을 썼다. 그러나 이 비는 1625년 정월 신흠에게 비문이 촉탁되어 1633년 4월에 건립되기까지 약 8년 동안 개정 여부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난관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총 36개처에 대한 개정이 이루어졌는데, 유념할 것은 찬자 신흠의 문집 ?상촌고(象村稿)?에 실린 내용과 비에 새겨진 내용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정우락 / 경북대학교 국문학 박사
2010.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