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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시 273

네거리 춤/김선자 네거리 춤 김선자 무료급식소 꺼칠한 골목 담벼락 기대어 자라난 바랭이 속에 숨어 피어난 애기똥풀은 우묵한 반찬그릇이다 검게 변한 시멘트 계단 거무스레 허물어진 이빨들로 턱뼈는 끙끙거린다 겨우 올라가는 발걸음 늦가을 햇살 아래 곰팡이 검은색 희게 보이게 구석구석 꾸미는 구부정한 등 오그라든 손등 플라타너스 잎새 같은 재주넘기 혀에 걸린 네거리 새소리 개소리 자전거소리 사중주 악보의 네 박자 마디 할아버지 느려진 발자국소리에 뭉개진다 서툰 행진곡에 돌아서던 한 분 한 바퀴 두 바퀴 곡조에 맞추어 제법 살갑게 돌고 돈다, 아찔한 짝지어 늘어선 밥 그릇 든 행렬 촉촉 여린 애기똥풀 꿈꿈한 냄새 시절이 어둔 네거리 입 대신하여 노란 웃음이 저릿저릿 채우고 있다 2023. 11. 15.
젊은 날 뿌린 꽃씨/김선자 젊은 날 뿌린 꽃씨 김선자 젊은 날에는 마음에다 꽃씨를 자주 뿌렸다 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다 마음 졸이며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흙을 걷어내고 다시 뿌리고 뿌린 씨앗이 움도 트기 전에 화살처럼 날아가 버린 젊은 날 뛰어가 차마 잡지도 못하고 꽃도 피우지 못하고 뒤안길에 숨어 있는 젊음의 꽃씨들 꺼내어 들여다보고 싶은 지난날 뿌려둔 꽃씨 쑥구렁 같은 마음 다시 뿌려 보고 싶은 향기가 먼저 퍼지기를 바라는 2023. 11. 15.
에밀레종에 대한 마음 줄/김선자 에밀레종에 대한 마음 줄 김선자 가벼운 공기 깃으로 가른다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 날개 짓하며 떠 있다 호수 같은 하늘에 던진 달 따러가는 아이들 낚시대 한이 맺힌 전설 잡으러 종소리 따라 세차게 부딪혀 온다 은결처럼 부서지는 천년의 자락 에밀레 에밀레 청동에 새겨진 한숨 환하게 불 밝히는 조그만 배가 높은 물결 헤치고 갈 때와 같이 뜨거운 쇳물 속에서 녹아내린다 꿈결인양 한 아이 애절한 울음소리 가슴에 품고 지그잭지그잭 날개 짓하며 떠 있는 새 한마리 2023. 11. 15.
야누스*/김선자 야누스* 김선자 긴 혀가 두 가닥으로 보였다나불거렸다 광고지처럼 가늘게 뜬 눈의 초점이 흐려진 그녀뜯겨진 달력 틈 사이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산 그림자 희미한 호수위로 비껴가는 노을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빨갛다 그녀는 그녀 뒤로 소리없이 돌아섰다 도마뱀처럼 냄름거리는 긴 혀 말 타고 달리는 기사처럼바다사자처럼 해변에서 파도에 잠깐 밀려갔다 되돌아오고 그녀는 소라등의자에 앉아바람과 함께 노래 부르고나란히 함께하는 두 가닥의 혀 혀 뒤에 가득 고여 있는 비린내 나는 거짓 혀는 혀 그대로 참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녀의 혀는 그녀의 혀 뒤에서 굳어 가고 있었다 야누스*라고 조용히 말해야 하나 *야누스 : 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의 신 2023. 11. 15.
익숙하다/김선자 익숙하다 김선자 더듬어 시집을 머리맡 책들 위에 두고 스탠드 전등을 끄고 주섬주섬 책갈피를 끼운다 두 눈 대신 두 손이 눈이다 어둡다거나 밝다거나 하는 건 일상에 젖은 습관일 뿐이다 시각이 촉각에 양보하기만 하면 눈을 감아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 조금 전 읽었던 시 구절 끼고 있던 돋보기안경 놓인 자리 옷이 걸린 옷걸이 책상 컴퓨터 티브이 액자 시계 어둠속에서도 밝게 보이는 것들 익숙하다 온몸이 눈이다 그 중에 가장 또렷한 눈은 두 손이다 오늘도 이 두 손이 하는 일 욕망의 골짜기 빈 손이 될 수 없다는 듯이 쥐었다 폈다 한다 2023. 11. 15.
입력/김선자 입력 김선자 어제 퇴근 입력 신호가 없습니다 외부기기 전원상태 케이블 정상 돈은 피, 피는 힘듦, 문자가 옵니다 연결 여부 확인하세요 tv/외부입력 키 누르세요 피로는 삶의 무게 몇 킬로그램입니까 해당 입력으로 어디로든 전화하세요 널부러진 날 입력된 계획이 없다구요? 무기력합니까 치세요, 타닥타닥 두드리세요 해당 입력, 삶이 전환, 날씨 화창, 운수 대통, 케이블 비정상 연결 엔터키 작동 중지 마우스 도망갔어요 수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곧 당신의 모든 내장이 낱낱이 파 헤쳐 질 것입니다 피는 고통, 힘듦, 죽음의 공포, 입력하세요 내부기기 연결 정상 완료 오늘 출근 2023.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