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여애반다라9
이성복
검은 장구벌레 입속으로 들어가는
고운 입자처럼
생은 오래 나를 길렀네
그리고 겨울이 왔네
하얗고 퍼석퍼석한 얼음짱,
막대기로 밀어 넣으면
다른 한쪽은 버둥거리며 떠오르고,
좀처럼 身熱신열은 가라앉지 않았네
아무리 힘줘도
닫히지 않는 바지 자크처럼
無聲무성의 아우성을 닮았구나, 나의 생이여
애초에 너는 잘못 끼워진 것이었나?
마수다, 마수! 첫 손님 받고
퉤퉤 침을 뱉는 국숫집 아낙처럼,
갑자기 장난기 가득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생이여
어떻든 봄은 또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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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
1977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남해 금산』『그 여름의 끝』『호랑가시나무의 기억』『아, 입이 없는 것들』『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래여애반다라』등
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
-책소개
『아, 입이 없는 것들』이후 십 년 만에, 이성복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래여애반다라』가 출간되었다. 언뜻 불교 용어 같기도 한 이 낯선 제목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는 신라 시대 향가 「풍요, 공덕가」의 한 구절로, 이 여섯 글자 이두는 '오다, 서럽더라'로 풀이된다. 신라 백성들이 불상을 빚기 위해 쉼 없이 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고됨과 서러움을 위안하고자 불렀던 노래가, 이번 시집의 들머리에 놓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윷말처럼, 비린내 하나 업ㅄ던 물결"의 맑은 '죽지랑의 못'과 맨 끄트머리에 놓인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바라봄만으로 큰 위아닝 되었던 한 그루 '기파랑의 나무'를 각각 입구와 출구로 삼은 "이성복의 풍경"(문학평론가 김현)을 바라보고 드러내는 데 긴요한 열쇠 구실을 한다.
오랫동안 학생들과 함께했던 대학을 뒤로하고, 지난해 이순(耳順)을 맞은 시인은 모두 여든두 편의 시를 여섯 개의 장에 나눠 실은 시집 『래여애반다라』에 자신의 육십 해 인생과 지금껏 발표한 여섯 권 시집의 자취를 고루 담아내려 했다. "이곳에 와서(來), 같아지려 하다가(如), 슬픔을 보고(哀), 맞서 대들다가(反), 많은 일을 겪고(多), 비단처럼 펼쳐지고야 마는 것(羅)"이 바로 우리들 삶임을,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누구나 예외 없이 생-사-성-식의 기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하여 우리는 절망과 서러움으로 점철된 생의 '불가능성'을 거듭 되씹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노라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시종 담담하고 또 허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