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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기

녹색 두리기둥/김광규

by 김선자 2024. 2. 23.

문학과 의식 제 2회 시 당선작
 
 

녹색 두리기둥

 

김광규
 
 
 전깃줄 끊긴 채 자락길 어귀에
 시멘트 기둥으로 홀로 남은 전신주
 담쟁이 덩굴이 엉켜 붙어
 앞으로 옆으로 위로 퍼져 올라가
 우뚝 솟은 녹색 두리기둥 만들어 놓았네
 폐기된 전신주 꼭대기
 담쟁이 더 기어 올라갈 수 없는 곳
 바람과 구름을 향해
 아무리 덩굴손 허공으로 뻗쳐보아도
 이제는 더 감고 올라갈
 기둥도 나무도 담벼락도 없네
 살아있는 덩굴식물이 한 자리에
 그대로 소나무처럼 머물 수 없어
 제 몸의 덩굴에 엉켜 붙어
 되돌아 내려오네
 온갖 나무들 드높이 자라 올라가는
 저 푸른 하늘에 앞길이 막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되돌아 내려오며
 삶터 잘 못 잡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두리기둥 만들어 놓았네
 
                                                       《문학과의식》2012년 가을호
 
 

                                                   
 수상소감
 
 
 담쟁이덩굴은 사람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집의 담벼락이나 창틀을 타고 올라가는 이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은 놀랍습니다. 큰나무의 몸통과 줄기를 타고 우듬지까지 올라가는 것도 보기에 현기증이 날 정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덩굴 물이 그렇듯이 담쟁이덩굴에게도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혼자서 일어서지 못하고 꼭 다른 식물이나 물체에 의지해야만 위로 또는 옆으로 퍼져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상승과 전진의 집요한 활력을 무엇도 막을 수 없어서 그 한계는 쉽게 인식되지 못합니다. 내가 십여 년전에 발표한 산문시 『담쟁이덩굴의 승리』가 바로 그 예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요즘 와서 나에게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안산 자락길 입구에 서 있는  『녹색 두리기둥』이었습니다. 담쟁이덩굴의 끝없는 확산을 저지하는 것은 땅이나 바위나 담벼락이나 기둥이나 나무와 같은 물체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었습니다. 폐기된 전신주 시멘트 기둥을 타고 올라가 녹색두리기둥을 만들어 놓은 담쟁이 덩굴이 붙들고 올라 갈 곳 없는 허공에 막혀 되돌아 내려오는 것을 보고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이나 기어 올라가 미래의 세계를 온통 뒤덮어 버릴 것만 같은 덩굴 식물의 전진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허공이라는 것을.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들여서 이 세상을 가득 채우려고 하는데, 이 모든 시도를 무위로 만드는 것은 바로 「허공」, 즉 「텅 비어있음」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깨달음을 알아채고, 작품상을 수여한 계간 《문학과의식》의 날카로운 혜안에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