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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기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성복(1959~ )

by 김선자 2024. 2. 23.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1959~  )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성기(性器)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 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이성복<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