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1959~ )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성기(性器)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 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
이성복<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