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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글

7.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있다/로버스트 A. 존슨 지음-빛과 그림자의 균형 잡기 2

by 김선자 2024. 4. 6.

빛과 그림자의 균형 잡기  2

 

어린 시절 융은 스위스의 엄한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에 대한 엄격한 교육은 그가 의학을 공부하던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장시간 신경을 집중해야 했던 탓에 융은 한 가지에 몰두하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꿈에 등장했던 어두움과 원시성을 무시하여 얻은 특성이다. 우리 의식의 특질이 더 정교해질 수록 반대편에는 더 큰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융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통찰력 중 하나다. 자아와 그림자는 같은 원천에서 만들어지고 서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빛을 밝히는 것은 곧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 없이 서로 존재하지 못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다는 말은 신성한 자리인 내면의 중심에 도달하는 것인데, 이 방법 외에는 어떻게든 이 중심에 도달할 길이 없다. 이 과업을 성취하지 못하면 성숙해질 수 없고 또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
인도에는 성인의 특질을 규정하는 단어가 셋 있다. 사트Sat, 치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인데, 사트는 삶의 존재론적 측면을 의미한다. 대개 시소에서 좌측에 위치하는 부분이다. 차트는 이상적인 가능성으로 대개 오른편에 위치한다. 아난다는 지복, 기쁨, 깨달음의 황홀경을 뜻하는데 바로 이것이 시소의 중심축이다. 사트와 차트가 서로 짝을 이루고 이를 충분히 의식할 때 아난다라는 삶의 기쁨 또는 법열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함으로써만 얻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극단적으로 바른쪽에 치우친 행위를 했다면 왼편에 놓일 수 있는 행위로 시소의 균형을 맞추어줘야 한다. 그렇다고 매 순간 고개를 돌려 같은 무게의 어두운 내용물이 반대편에 만들어졌는지 확인해볼 필요는 없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왜 사생활에서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예술가들은 최종 산물인 자신의 창작품에 어두움을 포함시켜서 그림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광의의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것이 순수 천재성이다. 이런 예술작품의 특질을 전일성, 건강, 신성함으로 들 수 있다. 작품의 생명력은 생기가 없는 일방적인 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성의 다양한 측면을 다 포괄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본래 성인의 특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최근에 한 친구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창작성이 뛰어난 수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사는가? 역사 속에는 충격적이거나 괴벽스런 행동을 한 위인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협의의 제한된 창의력은 그만큼의 협소한 그림자를 불러내지만, 광의의 창의력은 더 깊은 어두움을 불러낸다. 음악가 슈만은 정신이상으로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피카소의 어두운 측면 역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우리는 동시대 천재들의 괴이한 습관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걸출한 사람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에 관해 들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창의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또 우리의 선물에 반드시 수반되는 어두운 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예술품을 창작하거나,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타인을 도와주거나, 집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가족을 보호하는 이 모든 행위는 시소의 반대쪽에 동등한 무게를 요구하므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창의력을 거부하거나 일상에서의 선행을 중단해서는안된다. 이 동력을 깨달아 이런 작은 선행을 보상할 수 있는 의식적인 몸짓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석 심리학자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Marie-Louise von Franz박사와 바버라 한나Barbaba Hannah는 스위스 쿠스나흐트Kusnacht에서 한 집에 살았는데, 둘 중 한 사람에게 행운이 생기면 그 사람이 한 주일 동안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맡았다. 이는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행위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긍정적인 일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이 일에 수반되는 그림자적인 측면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융은 종종 친구들에게 "최근에 끔찍한 성공을 거둔 적이 있어?라고 묻곤 했는데, 이는 빛과 그림자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실제로 겪었던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나를 아주 힘들게 했던 주말에 벌어진 일이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손님이 우리집에 머물렀는데 이 손님은 초대했던 기간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나는 이 기간 내내 불편한 상황을 참아내야만 했다. 그러자니 헤라클레스 같은 인내력이 필요했고, 심지어 내 예의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침내 손님이 떠나자 나는 커다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큰일을 해낸 듯한 느낌이 들어 정원에 심을 예쁜 꽃을 사려고 화원에 갔다. 그러나 내 의식 속에서 미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꽃가게 점원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언쟁이 붙었다. 바람직하지 않은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내 그림자를 의식적으로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애꿎은 낯선 점원에게 내 그림자를 내려놓은 탓이었다. 어쨌든 시소의 균형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방법이 아주 서툴고 어리석었다.
창조적인 남성들의 그림자에 대한 대가는 그 곁에 머무르는 여성들이 치르는 경우가 빈번하다. 또 창조적인 여성의 어두운 면, 곧 창조의 부산물 때문에 에너지가 고갈되는 남성들도 많이 있다. 최악의 경우는 창의적인 부모의 그림자가 자녀들에게 전가되는 경우다. 성직자가 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나, 부유한 부모를 둔 자녀들이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힘들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문명의 발달은 우리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기술혁명을 이룬 우리는 세상을 편리하게 여행하고 일상의 힘든 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연구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오늘날 평범한 가족이 기계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일은 과거의 하인 28명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얼마나 경이로운 시대인가! 그러나 우리가 이룩한 효율적인 사회의 정반대편에는 권태와 외로움이란 그림자가 불가피하게 등장한다. 전 지구적 차원으로 보면, 신세계를 향한 유토피아적 비전이 거대해진 만큼 전쟁과 분쟁의 수도 증가했다. 현대사회의 뛰어난 창의력은 이와 함께 수반되는 그림자를 인식하고 이를 현명하게 다룰 때만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