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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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조_ 좋은 시 읽기
문향만리/ 소파에서/ 성윤석
소파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당신 어디 살아요? 라고 묻는다면/늘 소파에서 살아요 라고/대답할 것이다//소파에서 자고 일어나고/소파에서 어두워져가는 베란다/창밖을 짐승처럼/바라보았다//소파에서 아팠고 상처를/입었고 숨었다//어느 날은 입을 벌려 소―파 라고/발음을 해보기도 하였다//소파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그 편지는/당신과 나의 이야기는 같은 책장이 넘어가는/이야기…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오//같은 것들이었다//당신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갈 것이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언제든 소파에서 왔고/죽어 소파로 갈 것이오 라고 대답할/것이다//소파는 내게로 와서/때도 되고 곳도 되었다//나는 소파에서, 라는 말을 쓸 수 있는/유일한 자가 되었다//그리고 그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문제였다
-웹진 「같이 가는 기분」(2024, 봄호) 전문
일찍이 ‘소파’를 소재로 시를 쓴 이는 황지우였다. 그의 시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만 한 사나이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젊었을 적 사진으로는 못 알아보게 뚱뚱해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여기서 살찐 소파는 ‘사나이’를 빗댄 사물이다. 이 사내는 비판 의식이 부재한 상태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당대의 전형적인 소시민을 대표한다.
비교적 최근에 발표한 권혁웅의 「동물의 왕국」도 소파를 중심으로 한 작품이다. 시의 부제가 “동물계 소파과 의자속 남자 사람”이므로, 황지우의 「살찐 소파의 일기」와 상호텍스트적인 작품임을 친절하게 일러주는 셈이다. “이 동물은 (…)/넓은 거실에 서식하면서 소파로 위장하고 있죠/중추신경은 리모컨을 거쳐 TV에 가늘게 이어져 있습니다”라는 시의 일부만 읽고도, 텔레비전 앞에서 리모컨만 누르고 앉은 남편이 떠올라 화가 치민다는 주부가 한둘이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성윤석 시의 화자 역시 앞선 시의 인물들처럼 현실 순응적이고 세속적인 현대인을 대표하는 걸까? “소파는 내게로 와서/때도 되고 곳도 되었다”라니, 삶이 곧 소파다. 대체 ‘소파’란? 엄원태나 손진은 시인의 경우, “소-파”를 ‘So far’로 읽어서, ‘어느 정도의 한계’ 혹은 ‘그렇게 멀리’의 이중적 의미로도 해석한다. 소파로 와서 소파로 살다가 소파로 가는 삶. 제한된 조건 속에 태어나 아무리 기를 써도 고작 ‘여기까지’ 혹은 ‘어느 정도까지만’ 살다 가는 인생. 흙수저로 태어나 비정규직으로 살다 가는 현대인들의 상징이 혹 소파(소-파, So far)는 아닐까 싶다.
하지만 시인은 “나는 소파에서, 라는 말을 쓸 수 있는/유일한 자가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그에게 ‘소파’로서의 삶은 “매우 중요한” 선택이었고, 이 때문에 그의 선택이 자본주의적 삶의 역행으로 읽히는 것이다.
신상조 문학평론가
출처 : 대구일보(https://ww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