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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산문

나무 향기 / 김선자

by 김선자 2024. 6. 6.

나무 향기 / 김선자
 
 
비가 온 뒤의 숲은 싱싱한 기운이 넘치고 각각의 나무에서 풍기는 냄새도 독특하다. 젖은 나무 잎을 밟을 때마다 잘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나무들에서 각각의 향기가 다르게 맡아 지듯이 사람에게서도 나무나 꽃의 향기를 연상시키는 냄새나 향기가 느껴진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떤 사람은 장미꽃을 떠올리게 하는데, 용모가 화려하여 마치 장미 향기가 물씬 퍼져 오는 것 같다. 장미는 꽃 중의 꽃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오고 있는데 화려한 꽃의 모양과 색과 향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시가 있어 간혹 찔리기도 한다. 그 사람도 곁에 있으면 한 번씩 가시에 찔린 듯 따끔거리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피하고 싶고 되도록 안 만났으면 할 때가 많다. 향기보다 가시가 더 많은 사람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소나무를 닮아서 청정하고 늘름한 기품을 보게 된다. 늘 푸르고 고고히 서있는 소나무는 겨울의 추위와 설해도 능히 이기고 송화 가루로 다식을 만들어 먹게 하고, 솔잎으로는 술을 빚고 송편을 찔 때 그 위에 얹어서 향기가 나도록 하는 등 사람들에게 꾸준히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소나무는 우리네 옛 선비를 떠오르게 한다. 꺾이지 않는 기상을 엿보게 한다.
 
물푸레나무를 닮은 사람도 있다. 정말 물푸레나무 곁에 서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뜻으로 물푸레나무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실제로 가지를 꺾어 하얀 종이컵에 맑은 물을 받아 담가보면 맑고 파란 물이 우러나는데 가을 하늘이 연상 된다. 물푸레나무는 푸름과 그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모든 빛이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나무다. 그 속에는 하늘과 물빛이 녹아있고 파르라니 물들인 스님의 옷자락이 담겨있고, 이름만으로는 여린 듯 가냘픈 표정이지만 수많은 선비들의 회초리가 되어 전념케 했던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 한자이름 그대로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인(수청목;水靑木) 이 나무의 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정말 물이 파래진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도 늘 푸름을 간직하고 가냘픈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간혹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 같은 냉엄함이 풍겨져 나온다. 어디서나 잘 어울리고 인자한 품성은 물푸레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선 듯 하지만, 부드럽고도 단호한 음성과 눈길은 물푸레나무 회초리로 매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게 할 때도 있다.
 
어릴 때 본건데 어머니는 물푸레나무를 꺾어다가 물에 담가 두어 푸르스름한 물이 우러나면 흰 천에다 물을 들이셨다. 푸른색이 은은하게 도는 그 천으로 옷을 해 입으시고 단정히 머리를 빗어 비녀를 꽂고 대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 마치 물푸레나무 한그루가 걸어가는 것처럼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오는 섭섭한 감정이 내게서 멀어져 가는 서늘한 푸름으로 느껴졌다. 이 사람 곁에 있을 때도 맑고 파란 가을 하늘이 떠오르고 그곳에 매달린 하얀 구름꽃 같은 이웃들이 보이고 어머니의 단아한 비녀가 떠오른다. 그것은 따스한 마음일 때도 있지만 뒷모습에서 느끼는 허전함도 함께한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이 돌아서 갈 때면 무언가 텅 빈, 물푸레나무의 푸르름을, 찬바람처럼 느끼곤 했다.
 
어떤 시인은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오규원 시 '한 잎의 여자')라고 노래했다.
 
한 때는 물푸레나무가 너무 좋아서 찾아다닌 적도 있다. 아마도 즐겨 읽었던 소설이나 시에서 물푸레나무가 자주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물푸레’ 라는 어감도 멋스럽게 느껴졌다. 그 나무는 볕이 잘 들고 습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잘 자라기 때문에 물가에나 수목원이나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나무이다.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나 산 속의 작은 개울가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이다. 달걀모양으로 생긴 잎이 하나의 잎자루에 대여섯 개가 붙어있으며 서로 마주난다. 열매는 길이나 너비가 싸인펜 뚜껑만 한데 주걱모양으로 날개가 붙어있고 한꺼번에 수십 개씩 무더기로 달린다. 여러 가지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수목원에 가서 사진도 찍어 보고, 나무들이 울창한 숲에 가서 일부러 찾기도 한다. 마치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듯이 설레는 가슴을 안고 간다. 나무에 겹쳐지는 한 사람을 살 부대끼며 살갑게 만나기 위해 가슴이 뛴다.
 
오늘 비가 온 뒤라서 아직도 축축하고 음습한 기운이 남아 있는 숲길을 걸으며 물푸레나무, 그 한사람만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그리워하기에는 너무 맑고 조찰하여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가까이 할 수없는 것에 골이 나기도 한다. 그의 글에는 담담하면서도 우아한 풀 냄새가 나고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기를 좋아한다. 간혹 쌉쌀하면서도 담백한 도라지 맛이 나기도 하는 사람이다. 물푸레나무가 산간지방에서는 눈길에 잘 걷도록 덧신을 만들어 설피의 재료로 썼다고 하는데, 그 사람도 다른 사람의 덧신이 되고자 애쓰는 것을 본다. 그 사람 곁에 있으면 언제나 편안해지고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지경이다. 마치 물푸레나무의 줄기 껍질처럼 좋은 약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나무들은 유년의 기억도 떠 올리게 하면서 추억에 젖게 한다. 나는 나무에 잘 올라가 놀았는데 주로 뽕나무였다. 가지에 앉아서 오디를 따 먹고 노래를 부르면서 놀았다. 입이 새까만 줄도 모르고 해가 져서 어스름이 온 줄도 모르고 오디를 먹었다. 잘 익은 오디는 검자주색으로 약간 떫떨해도 단 맛이 많이 났다. 그러나 새파란 오디는 새콤하면서 아린 맛이었다. 나는 새파랗게 덜 익은 오디를 잘 먹었는데, 그러면 뽕나무 잎을 갉아 먹는 누에가 생각나고, 누에들이 잎을 먹을 때 밀물이 들어오는 소리 같았던 사그각거리던 소리도 들리고, 만지면 좀 징그럽다가도 누에의 보들보들한 몸을 느끼면 금방 사랑스러워 지던 감촉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산책을 하면서 줄기가 이리저리 벋어가는 상념에 잠기면서 물푸레나무를, 그 희게 빛나는 둥치를 쓰다듬어 보고 있다. 세상의 그 많은 사람 중에 자주 자주 한 사람이 떠오르는 건 물푸레나무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오로지 그렇다.
 
숲의 향기에 마음이 맑아져서 되돌아오는 길은 사색의 폭이 깊어지고 나무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들을 가슴에 새겨 보고 심오한 인생도 조금은 알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나는 어떤 나무의 향기를 풍기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2011. 8.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