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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산문7

붉은 모랫벌/김선자 붉은 모랫벌 김선자 그해 여름은 전쟁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던 때였지. 우리는 하루 백리길을 걷고 또 걸었어. 망개덩굴이 산기슭을 휘덮고 산새가 우우우 울어대는 금방이라도 늑대가 나올 것 같은 산 길, 타박타박 걸어 고향을 찾아 가던 그 날이 옆구리에 낀 가방 안에서 다람쥐가 뛰어 나오듯 달려 나오네. 전쟁이 무서워 숨어 다니며 하루하루 헤매던 산과 들에서 나만이 아는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가 나랑 반 백 년을 함께 한단다. 누렇게 익어가는 밀 이삭을 불에 살짝 구워 호호거리며 먹던 맛이랑 목화밭 지나며 똑 따서 먹던 달래 맛이랑 뱀이 알을 슬었다는 작은 도랑물에 미숫가루 타먹던 일은 잊을 수가 없어. 지나가던 마을에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했던 초가 집, 그 집 처녀는 너무 하얗게 분을 발라 백년 .. 2023. 4. 7.
목단/김선자 목단 김선자 몇 년 전 민화를 배운 적이 있다. 한지에 본을 그리고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다. 여러 장의 그림 중에서 목단을 골랐다. 꽃은 세 송이며 색깔이 빨강과 주황 노랑이고 잎은 밝은 초록색이었다. 수채화나 유화를 그릴 때는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한 후 색칠을 하는데, 여기서는 이미 복사된 것 위에 한지를 놓고 본을 떠서 색을 칠하였다. 가르치는 강사는 색만 칠할 것이 아니라 우선 조화부터 생각하라고 했다. 색은 묘한 정감과 에너지가 서로 간에 밀치고 잡아당겨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떤 묘한 힘이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시회 관람을 가보면 어떤 색은 한데 어우러지고 어떤 색은 서로 거부하면서 배척하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아주 놀랄만한 조화와 균형을 만들었다. 이들 색은.. 2022. 11. 19.
숲속 작은집/김선자 숲속 작은집 김선자 모과나무 가지에 집이 생겼다 지푸라기에 진흙을 발라 소박하게 지은 집 비바람 막아주는 지붕은 우거진 모과나무 이파리였다 그 집이 몹시 궁금하여 살금살금 다가가 조심스레 드려다 보았다 먹이 구하러 나갔는지 어미는 없고 하얀 알 넷이 둥지 속에 있었다 가지가 심하게 흔들리고 목덜미가 수상해 뒤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어미가 나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날은 새벽이었다 찌찌찌 짹짹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깨어 모과나무에 가 보았다 아, 요런! 어미 없는 방에서 이불은 걷어 부치고 알에서 깬 새끼들 빨간 부리 흔들며 입은 짝짝 벌리고 벌거죽죽한 살갗 아직 날개도 덜 자란 벌거숭이들 엄마 기다리는 반짝이는 눈 경계할 줄 모르는 조그만 발갈퀴 이제 저 넓은 하늘이 내려와 둥지에 가득 담기고 있었.. 2022. 11. 18.
장다리꽃/김선자 장다리꽃 김선자 어두우면 더 환해지던 별빛 때문에 조금은 쓸쓸해지곤 했습니다. 별들의 침묵은 시나브로 희미해져가고 거무스름한 나무는 반들반들 손때가 묻어 호롱불 아래서 반짝거리고 수런대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어머니가 베틀 앞에 앉으시면 비단 무명이 생으로 녹아들어 삶의 방향을 틀어 주곤 했습니다. 낡은 베틀이 치커덕거리던 소리에 싸리문 앞에서 졸고 있던 삽사리도 고개를 주억 거렸습니다. 어둠이 빨아들인 기억은 또렷하여 철 지난 눈 길 저쪽에서 구비돌아 왔습니다. 베틀에 앉아 자주 부르시던 어머니의 노래는 둠벙에 빠져 쏙독거리던 쏙독새처럼 들렸습니다. 어화 벗님네야 꽃구경 가세 송홧가루 날리는 뒷산으로 가세 진달래 화전 부쳐 온 동네 나눠 먹세 벌나비 호랑나비 짝을 지어 날아드는 앞마당 꽃밭에 모여 앉.. 2022.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