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선자의 시 154

호박잎 찐다/김선자 호박잎 찐다 김선자 보드라운 솜털 살면서 날 세우던 오기는 감추어 버리고 서서히 숨죽어 간다 까끌까끌하던 저 호박잎 푸르고 싱싱해서 거침이 없던 온갖 벌레 침공에도 늠름하던 혈기 똥냄새 구덩이에 온몸 쳐 박고 꿈 키우던 어둔 밤 끓어오르는 가슴이 뜨거웠지 별이 잡고 싶어 동그랗게 오그리다 벌리던 손 하늘 향해 벋어가던 손 언 땅에서도 솜털 세워 찌르고 싶어 했지 욕망이 이슬보다 더 영롱하던 허공 캄캄하던 그 벽 너머로 타던 마음 뜨거운 사막 넘나들고 있었지 2023. 6. 20.
읍천(邑川) 바닷가/김선자 읍천(邑川) 바닷가 김선자 경주 읍천 바닷가 파도 소리길 검게 타버린 바위 푸른 바다에 외로이 누워있다 왜 누워 있는지 갈매기 앉았다 날아가며 말이 없고 천고의 신비 속에 감추어진 얼굴 부채살처럼 벌어진 다리 파도가 씻겨간 그 날의 일들을 입 다물어 버린 바위여 내 가슴에 묻힌 멍울 닮아 붉었던 열정 잊고 싶지 않은 이제는 굳어 버린 마음 하나 깊고도 슬픈 멍 퍼렇게 2023. 6. 20.
아버지/김선자 아버지 김선자 그의 마음은 종이학 날리듯 품 안의 자식들을 하나하나 떠나보내는 일 사십대 후반에 아내를 잃고 구순이 넘도록 그때의 두 배로 살았다는 말 미안함의 꼬리가 되어 늘 따라 다니고 그에겐 그 꼬리가 너무 무거웠다 어둠이 아슴아슴한 밤 집 앞 꽃밭에서 거무스름한 무엇이 이물처럼 노젓는 사공처럼 자그마하고 나직한 그림자 하나 사분거렸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샛바람이라도 불어 파도에 배가 뒤집혀지기를 바라는 심사 어딘가로 떠 내려가기만 바랐다 돛대도 삿대도 없이 아슬아슬 흔들리는 빈 배 한 척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방 책상도 옷걸이도 작은 서럽장도 낡은 의자도 검은테 돋보기안경도 그가 없는 방에서 쓸쓸했다 구석에 세워둔 지팡이 한 쌍 주인이 떠난 허허한 바다에서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2023. 5. 11.
햇살/김선자 햇살 김선자 동네 아이들 등에 올라 앉은 햇살 자전거 타듯 아이들 돌린다 맑다 따스하다 반짝인다 구부정한 할머니 어깨에 올라 탄 햇살 살아 온 날들에 귀 기울인다 빵빵 자동차가 달린다 깜짝 놀라는 은색 눈부신 햇살 고달팠던 젊은이의 하루 묵직하게 비춘다 밝다가 어두워지는 햇살 잠시 구름에 자리 내어주고 나무 그늘에 그림자 지우며 맑았다가 얼룩이 진다 으스스 몸이 시려온다 햇살은 어둠에 자리 내어주고 낙은 곳으로 내려 앉는다 내려 앉은 햇살 다시 올라간다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