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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시 156

나무 그늘/김선자 나무 그늘 김선자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저 할미 어디 사는 누군지 하염없는 얼굴로 바라보는 길 위에서 비둘기 두 마리가 놀고 있다 굽은 등에 올라앉은 등짐은 저 할미의 인생이 수북히 담긴 달집이다 골골이 패인 주름살도환해 보이는 웃음도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부수수한 흰 머리카락하얀 명주실 풀어 놓은 실타래 같다오물거리는 입가엔 오달진 삶이 머문다어느새 그 얼굴 내 얼굴이 되는 푼더분한 세월 비켜 가버린 무거운 어깨할미의 새가 되어 비둘기가 되어나무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5. 2. 6.
할매 추어탕집/김선자 할매 추어탕집 김선자 부슬부슬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하루의 고단함 짊어진 사람들쳐진 어깨 움츠리며 모여 들었다살다 보면 알 수 있던 날들도 있었건만한 때는 세상을 향해 삿대질도 해대고먼 세상으로 떠나 버리고 싶었다허방을 짚은 나무뿌리 같은 인생거꾸로 매달려 울기도 했다밝은 날과 어둔 날들이 날 바꿈하며꿈틀꿈틀 숨어들기도 했다고달픈 삶 속으로 한번 씩 들려오던할매의 한숨소리가 추어탕 국물에 빠지기도 했다 살아서 죽어 보는 시간을 위하여팍팍한 붓질로 질곡의 세월을 그려가던미꾸라지처럼 할매는 아름답고도 애절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영감이 살아있다면 또다시 다투겠지지독히도 고집부리던 사내안으로 휘어진 한 쪽 마음에 눈시울 적시는 할매추어탕집은 구수한 생들로어제도 오늘도 북적대었다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 2025. 2. 6.
별/김선자 별 김선자 어머니는 실 매단 꼬챙이에 깎은 감을 꿰어별이다 너희들 줄 별이다 하며 웃으셨다 별은 처마 밑에 줄줄이 매달리고 바람이 불어 올 때면 빙글빙글 돌았다잠자다 물 마시러 나온 밤 달짝지근한 냄새 풍기며 빙빙 돌고 있는 별들순이 눈에 어른거렸다입이 오물오물 망설이다 하나만 쏙 빼어 냉큼 입에 물고 씹는 순이말랑하면서도 쫀득한 그 별의 맛은 보름달 보며 먹던 찰진 오곡밥보다 더 맛이 있었다 별 하나 나 하나 순이 손가락 하나하나 별은 하늘로 오르기 전 하나 둘씩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저 멀리 푸르디푸른 창공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저 별보다 일곱 살 순이에게는 처마 밑에서 대롱거리는 이빨 빠진 별들만 쳐다보여서한 번 씩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이었다해마다 곶감 만들며 살아온 순이에게 별은 보고 싶은 어.. 2025. 2. 6.
호박잎 찐다/김선자 호박잎 찐다 김선자 보드라운 솜털살면서 날 세우던 오기는감추어 버리고서서히 숨죽어 간다 까끌까끌하던 저 호박잎푸르고 싱싱해서 거침이 없던온갖 벌레 침공에도 늠름하던 혈기 똥냄새 구덩이에 온몸 쳐 박고꿈 키우던 어둔 밤끓어오르는 가슴이 뜨거웠지 별이 잡고 싶어동그랗게 오그리다 벌리던 손하늘 향해 벋어가던 손언 땅에서도 솜털 세워 찌르고 싶어 했지 욕망이 이슬보다 더 영롱하던 허공캄캄하던 그 벽 너머로 타던 마음뜨거운 사막 넘나들고 있었지ㅡ시집 , 시와시학, ,,2019. 2023. 6. 20.
읍천(邑川) 바닷가/김선자 읍천(邑川) 바닷가 김선자 경주 읍천 바닷가 파도 소리길 검게 타버린 바위 푸른 바다에 외로이 누워있다 왜 누워 있는지 갈매기 앉았다 날아가며 말이 없고 천고의 신비 속에 감추어진 얼굴 부채살처럼 벌어진 다리 파도가 씻겨간 그 날의 일들을 입 다물어 버린 바위여 내 가슴에 묻힌 멍울 닮아 붉었던 열정 잊고 싶지 않은 이제는 굳어 버린 마음 하나 깊고도 슬픈 멍 퍼렇게 2023. 6. 20.
아버지/김선자 아버지 김선자 그의 마음은 종이학 날리듯 품 안의 자식들을 하나하나 떠나보내는 일 사십대 후반에 아내를 잃고 구순이 넘도록 그때의 두 배로 살았다는 말 미안함의 꼬리가 되어 늘 따라 다니고 그에겐 그 꼬리가 너무 무거웠다 어둠이 아슴아슴한 밤 집 앞 꽃밭에서 거무스름한 무엇이 이물처럼 노젓는 사공처럼 자그마하고 나직한 그림자 하나 사분거렸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샛바람이라도 불어 파도에 배가 뒤집혀지기를 바라는 심사 어딘가로 떠 내려가기만 바랐다 돛대도 삿대도 없이 아슬아슬 흔들리는 빈 배 한 척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방 책상도 옷걸이도 작은 서럽장도 낡은 의자도 검은테 돋보기안경도 그가 없는 방에서 쓸쓸했다 구석에 세워둔 지팡이 한 쌍 주인이 떠난 허허한 바다에서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2023.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