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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글

16.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있다/로버스트 A. 존슨 지음-의례로 그림자 표현하기

by 김선자 2024. 4. 15.

 

의례로 그림자 표현하기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궁정의 삶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외양간에서 소젖을 자는 비천한 일을 시도했다.

앞서 나는 의례를 통해 그림자에 접근하여 창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의례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먼저 양팔을 벌려 한쪽 손에는 자아의 내용물을, 다른 손에는 그림자의 내용물을 들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삶의 본질로 무엇을 해볼 수는 없다. 중세의 영웅들은 용을 죽여야 했다. 그러나 현대의 영웅들은 용을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의식 속에 통합시켜야 한다.

의례를 치를 때는 자신의 심리에서 왼편에 놓이는 특질 하나를 찾아내어 이 특질에 걸맞는 표현을 해줘야 한다. 왼편에 있는 특질을 표현하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거나, 단편소설을 쓰거나, 춤을 추거나,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어버릴 수 있다. 이 때 꼭 명심할 것은 물리적으로 표현은 하되 오른쪽에 있는 부분에는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사를 거행하는 동안에는 대단히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이때 제단이 안전한 보호막이 된다.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이 파괴적인 드라마에 다가가야하는 성직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제의를 입는다. 또 미사 전후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의례를 따로 진행한다. 본 미사 동안 불러낸 초인간적인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체험은 실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일어나는 사건만큼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자기Self의 관점으로 볼 때 이 행위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그림자의 특질을 자아의 특질과 동등하게 살려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치 않는 요소를 상징적으로 살아낼 때 문화는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는 모두 풍요로운 의례가 생활화되어 있다. 덜 건강한 사회에서는 전쟁, 폭력, 육체적 · 심리적인 질병, 신경증으로 인한 고통, 사건사고 등의 무의식적인 표현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런 파괴적인 행위도 결국 다 조악한 방법으로 그림자를 살아내는것이다. 그러므로 훨씬 현명하게 그림자를 살아내려면 의례를 통한 것이어야만 한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세계의 의례는 대부분 파괸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희생제물, 소각, 의식으로 거행되는 살해, 피 뿌리기, 단식, 금욕 등이 그것이다. 왜일까? 이것이 의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상징적으로 값을 지불하여 문화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물론 파괴적인 요소들을 근절시켜서 문화를 보호하려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파괴적인 요소를 편입하지 않고서는 문화를 활성화시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례 속에 빛 못지않은 어두움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다. 다시 가톨릭 미사를 들여다보라. 파괴와 창조, 악과 구원의 완전한 균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적인 사고와는 정면으로 부딪친다. 일반적인 생각은 우리가 충분히 창의적일 수 있다면 어두움의 힘을 압도하여 빛의 승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다. 진정한 창조적 행위는 온전한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지 부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빛을 선호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우리가 더 큰 실체를 보지 못하고 더 큰 비전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 실체(, 나는 이를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신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삶에 관한 단순한 견해로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온전한 경험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인간이 그림자를 통합하려는 시도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사례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다. 왕비는 불현듯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의 삶이 따분해졌다. 어느 날 뭔가 땅과 접촉하기를 원한다는 영감을 받은 그녀는 직접 소젖을 짜보기로 했다. 그리고 즉시 궁전안에 외양간을 지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소젖을 짜는 왕비라니! 이 일을 위해 프랑스 최고의 건축가를 동원해 외양간을 지었다(지금도 베르사유 궁정에 가면 외양간을 볼 수 있는데 대단히 아름답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어서 품종이 좋은 젖소를 스위스에서 수입하는 등 모든 준비가 끝난 날, 왕비는 다리 세 개 달린 높은 의자에 앉아 막 젖을 짜는 여인의 일을 시작하려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 일이 혐오스럽게 느껴진 왕비는 하녀더러 젖을 짜라고 명한다.

왕비의 원래 충동은 정확했다. 왕비에게는 궁정의 형식적인 생활과 균형을 맞출 정반대의 삶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일 왕비가 젖을 짜는 의례를 지속했더라면 그녀의 운명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왕비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궁정의 대지적 측면을 우유짜기 같은 단순한 행위로 살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극단적으로 우아한 궁정의 삶을 평범한 농노의 일을 통해 바르게 균형 잡고자 했다. 그러나 왕비의 끈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이 작업은 실패했다. 만일 왕비가 이러한 충동을 존중하면서 궁정의 고상함을 유지할수 있었다면 그것은 순수한 천재성 덕분이었으리라. 우리가 의례적인 양식으로 그림자에 목소리를 부여한다면 얼마나 많은 외부적 파괴행위를 피할 수 있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이 다른 대극을 수용할 용기를 갖춘다면 우리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소젖 짜기는 그림자 안에 있는 황금이며 그림자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의례는 거의 대부분 심리의 어두운면에 초점을 맞춘다. 절호의 기회 또한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황금의 기회를 받아들일 때 어두운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저항이 생기기도 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균형은 현대인의 삶에 매일 제시되지만 그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달러 지폐를 보라. 삼각형의 아랫변은 우리의 이분된 관점을 나타낸다. 자아ego와 그림자shadow의 축이다. 서로 대극을 이루는 옳음과 그름,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을 여기서 보게 된다. 이러한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한 우리를 괴롭히는 모순은 끝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의 의식을 갖춘다면 서로 싸우는 요소를 통합할 수 있고, 중앙에서 모든 것을 보는 혜안을 얻을 수 있다.

중심의 빛에는 그늘이 없다. 그곳은 마치 성배처럼 이 세상 너머 다른 세계의 시공간에 존재한다(저자의 책He : 신화로 읽는 남성성(동연 출판사,2006)참조). 초월의 순간이다. 얼핏 보기엔 빛과 어두움이 뒤섞여 회색의 타협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곳은 광휘가 빛나는 통합의 지점이다. 성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태복음 6:22). 눈의 단일함, 시소의 중앙은 깨달음의 장소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의식을 말한다. 또한 1달러짜리에 새겨진 "Novus Ordo Seclorum"이라는 글귀는 '신세계의 질서'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