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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글174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백주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백주은 세상이 하 수상하여 도 닦는 기분으로 두문불출, 면벽하다 간만에 집을 나섰더니 거리에서 누가 묻는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길에서 마주 서 있는 사람에게 이 무슨 어색한 질문일까. 점잖게 타이르려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는 질문과 놀거나 쉬고 있다는 대답들이 그 무슨 서류가 된 듯싶네. 하 수상한 세월 탓에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버린 것일까? 주고받는 대화들이 온통 선문답이 아니면 동문서답 형이니 시대가 만드는 게 영웅만은 아닌가 싶네. 그래 세월이여 흘러가거라. 풍파여, 부서지어라. 이 몸은 남겠노라, 나의 벽 앞에 2024. 4. 15.
제비꽃 여인숙/이정록 제비꽃 여인숙 이정록 요구르트 빈 병에 작은 풀꽃을 심으려고 밭두둑에 나가 제비꽃 옆에 앉았다 나잇살 먹었는지 꽃대도 제법이고 뿌리도 여러 가닥이다 이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한 송이는 하늘 쪽으로 한 송이는 포대기 속 잠결 아래로 그리고 또 한 송이는 곁에 있는 감나무 가지를 향하고 있다 저 감나무에 올라 울음보를 터트릴 거라고 입술을 떠는 꽃잎들 어떻게 본래의 이부자리대로 제비꽃을 심어놓을 것인가 요구르트 병 허리를 매만지다가, 안에 고여 있는 젖 몇 방울을 본다. 몸통만 남아 있는 불상처럼, 지가 뭐라고 젖이 돌았는가 울음보만 바라보며 몇 년을 기다려온 굼벵이 그 아름다운 허리를 오래 내려다본다 할 말 아끼다가 멍이 든 제비꽃에게도 합장을.. 2024. 4. 6.
수 련/채 호 기 수 련 채 호 기 안개 낀 새벽에 수련의 저 흰 빛은 수련이 아니다. 누가 공기의 흰 빛과 수련의 흰 빛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부풀어오르며 대기를 가득 채우는 수련, 공기처럼 형태도 없이 구석구석 끝도 없이 희게 빛나는 수련이여! 안개 낀 새벽에 공기는 수련처럼 희게 빛나다가 물처럼 푸른 두께로 출렁인다. 수련은 창틀 없는 유리처럼 푸른 깊이의 메아리. 물이 저 밑바닥의 내면으로부터 물풀을 흔드는 물고기 헤엄치는 혀로 푸드덕 말을 할 때 솟아오르는 커다란 공기 구릉―수면을 깨뜨리는 흰 포말 흰 파편은 수련, 물-말이 깨어져 날카롭게 빛나는 흰 수련! 수련 주위의 보이지 않는 저 공기는 수련의 생각들이다. 우리가 글자를 읽어나갈 때 우리 주위에서 태어나는 생각의 파동들처럼. 2024. 4. 6.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이윤학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이윤학 집에 가는 오솔길이 있었다 길게 머리를 따 묶은 소녀가 있었다 유월의 풀밭 안으로 스며드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 딱딱하게 굳은 땅바닥 위에 떨어진 꽃 막대기가 있었다. 소녀는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꽃 막대기에 대한 소녀의 설렘! 손을 가져가자 꽃 막대기는 금세 꽃뱀으로 변했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2024.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