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선자의 산문

기분 좋은 날 / 김선자

by 김선자 2024. 6. 6.

기분 좋은 날 / 김선자

 
 

성당의 성서대학 봄 학기가 오늘 부터 시작되었다.
입학식은 참례하는 미사로 대신했다. 성서 대학은 육십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것이데 성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고 오락도 하고, 점심 식사도 대접을 하는 명실 공히 우리 노인들을 위하여 개설한 대학이다. 남 녀 학생 수는 백명이 넘는다. 연세가 많은 분은 구십에 가깝다. 그러나 모두가 정정하고 멋쟁이들이다.
 
우리 조 에서 독서를 맡게 되어 내가 그 봉사를 하게 되었다. 독서는 성당에서 미사 때 제대에 올라가서 평신도가 성서를 읽는 것이다. 모두들 못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내가 하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평소에 신앙적인 일에서는 자꾸만 못한다고 양보하고 몸을 사리는 것보다는 맡기는 대로 선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터라 봉사자의 전화를 받자 그 자리에서 선뜻 승낙했다. 독서는 주로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이나 구약을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내려다보이는 제대에 올라서니 긴장이 되었다. 혹시 떨리지는 않을까, 감기가 다 낫지 않고 목소리가 좀 잠겨서 마이크 소리가 이상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나 펼쳐진 성서대로 또박또박 읽었다.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이 잘 했다고 말해 주어서 기분이 여간 기쁜게 아니었다.
 
입학식이 끝나자 신부님이 '울지 마 톤즈'라는 영화를 우리 성서대학 학생들에게 선물로 관람시켜 주신다고 하니 모두 좋아서 우우우 소리를 지르면서 어린애가 된 것 마냥 손뼉을 치고 즐거워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오히려 아이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교실로 내려가는 층계에서 우리 반 누군가가 나를 보고 '나이가 젊으니 역시 읽기도 잘하고 목소리도 좋대' 한다. '아이고, 젊기는 예', 하니까 그분은 손사래를 치면서 '아이다, 나이 한 살이 무섭대이' 하면서 웃는다. 생각하면 나이 한 살이면 삼백 육십 오일인데 밥그릇 수만 해도 만만치가 않고 어릴 적에는 크는 속도도 달랐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기들 보다는 젊은 게 확실하다. 한 살, 두 살, 하는 것이 도토리 키 재기 같겠지만 말이다. 나이가 지긋해도 여자는 역시 여자인지 누구나 나이에 민감하였다.
 
우리 반 학생은 열 명인데, 봉사자까지 합치면 열두 명이다. 순서대로 하면 내가 가장 나이가 적다. 그러나 내 나이도 상당한 것 같은데 젊다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세상이 달라져도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같으면 일흔이면 고래장 할 나이라 할 테고 그 가까이 다가서 있는 나도 뒷방 노인네 취급일 텐데 의학의 발달 때문인지 운동과 영양의 공급 때문인지 인간의 수명이 많이 연장되어 나도 노인 축에는 안 드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젊다는 말을 듣다니, 마음은 부풀어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기사 우리 반에는 일흔 둘 부터 팔십이 넘은 분까지 있으니 내가 좀 젊어 보였나 보다. 물론 봉사자는 젊은 사람이다. 두 명이 우리들을 위해 반을 이끌고 성서 나누기도 하고 친교도 도우면서 봉사한다.
 
오늘 나는 눈썹도 진하게 그리고 립스틱도 빨갛게 바르고 옷도 알록달록한걸 입고 갔다. 신부님은 늘 거무티티한 것 입지 말고 빨갛고 고운 색깔의 옷을 입고 입술도 빨갛게 바르라고 한다. 늙기도 서러운데 왜 곱게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절대 어두운 색은 입지 말라고 한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으니 다른 날 보다 더젊 게 보였던 것일까. 젊다는 소리가 정말 이렇게 기분을 좋게 하다니! 내일의 찬란한 희망이 다가오는 것 같고, 꿈을 꾸는 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니까 나이는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같았다. 이분들과 함께 공부하는 동안은 언제나 나는 젊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태어난 순서대로 쌓이는 것이니 따라 잡을 수 없는 게 아닌가. 아무리 나이를 먹지 않으려 해도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퇴적암처럼 켜켜이 쌓이는 게 나이가 아니던가. 나이를 먹어 가는 건 내 탓이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또 누구의 공력도 아니다. 선을 쌓은 사람이나 악을 쌓은 사람이나, 청렴한 사람이나 비굴한 사람이나 사기꾼이거나 미덕의 주인공 일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어쨋거나 모든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가는 것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또 나이를 먹는 것이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다. 기다리게 하지도 않는다. 돈도 들지 않고, 잘난 척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듯 세월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루를 허술하게 보낼 수 있으랴.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 세월 가는 게 안타까울 수 밖에는.
 
성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쇼윈도우에 비친 내 모습을 자꾸만 기웃거리며 보고 또 보고 했다. 이 나이에도 젊다는 소릴 듣고 기분이 들뜨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곰곰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었다. 여하튼 건강하고 신나게 오래 오래 살고 싶은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2011.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