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삶은 한 순간 / 김선자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친구 淑의 장례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시간 내내 나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소리죽여 울었다. 이젠 다정했던 친구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은 미어지는 듯 했다. 신부님도 목이 메어 말씀이 간혹 중단되곤 하여서 참석한 사람들을 더 슬프게 했다.
미사를 마친 후 나는 장지에 가는 운구차에 올라탔다. 친구가 묻힐 곳은 군위 가톨릭 묘지였는데, 산은 골이 깊어 구비 구비 산허리를 돌고, 구름이 머물다 갈 것 같았다. 길을 따라 차는 천천히 가고 있었다. 가는 길목마다 그곳엔 또 다른 세상의 아파트촌이 있었다. 산허리를 한 구비 돌 때마다 보이는 풍경은 저 아래 세상과 비슷한 동네처럼 보였다. 친구가 분양한 단 한 평의 아파트 둘레에는 소나무의 송진 향기가 물씬 풍기고, 산에서만 피는 작은 꽃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어디선가 푸드득 거리는 새의 날개 짓 소리가 울창한 나무 가지에서 계속 들려와 조용한 장지의 정적을 더 느끼게도 하고 깨트리기도 했다.
9월의 화창한 날씨는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떠나보내는 죽음의 마지막 장소에 온 것 같지를 않고, 마치 새 살림을 차린 동네에 온 느낌이 드는 건 화사하게 웃고 있는 영정 속의 친구 모습 때문인지 숙연한 차림으로 서 있지만 곡소리 한번 없고 슬픔의 표정이 별로 없는 조객들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인의 부군이었던 상제는 조객들을 의식한 탓인지 표정 관리를 너무 잘해서 오히려 얄미울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리도 태연하단 말인가. 물론 몇 날 며칠을 울었을 것이고 또 병간호하느라 지치기도 했을 것이지만 영원히 헤어지는 이 자리에서 좀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지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텐데 라는 생각을 하니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살아 있을 때는 그리도 자상한 척 하더니만, 남자들은 다 저런가 하며 섭섭해 했다.
검정 드레스를 차려 입은 두 딸과 까만 양복차림의 아들은 비통한 모습으로 어깨를 들먹이며 울곤 했다. 아들의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간혹 비틀거리기도 했다.
문득 산다는 건 정말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지난 봄 내가 친구 집에 갔더니 감기 비슷하게 아프다면서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고 그녀는 말했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가까운 mbc방송국 뒷산을 산책했다. 바람이 잘 통하는 나무 벤치에 앉아 이런 저런 일상사 얘기들을 하면서 속을 털어 놓고 마음을 나누었다. 주로 독일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공부를 하고 있는 두 딸의 이야기였다. 이제 올해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다면서 돌아오면 꼭 결혼시키고 손자는 자기가 돌보겠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쓸쓸한 웃음을 짓더니, 사실은 오늘도 독일에 있는 큰 딸아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돈 좀 부쳐달라고 했어, 하곤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얼마를, 하고 물으니 손가락을 두 개 펴보며 이만큼 이라 했다. 뭐? 내가 놀라며 묻자 숙은 글쎄, 말이야,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 때의 서글퍼 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후로 나는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두 달 후쯤 그녀 집에 전화를 했더니 딸아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내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었던 기억이 난다. 위암이 급성으로 진전되어 뇌종양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와 안 만나고 있을 동안 숙은 서울로 가서 암 검진을 받고 갖가지 치료를 하고 있었지만 너무 늦어서 치료가 불가능 했다고 한다.
하관을 하고 흙으로 덮기 전에 가족들과 조객들이 하얀 국화 한 송이씩을 그녀 몸 위로 던졌다. 나도 국화꽃 한 송이를 집어서 곱게 던지며 말했다. 친구야 잘 가거라.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얼마나 우리를 슬프고 안타깝게 하는지를 뼈저리게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가을이 오고 있는 산에선 무더운 여름에는 맛볼 수 없는 정취를 느끼게 해 주었다. 아직은 잎들이 푸르지만 여름날의 싱그러움과는 달랐다. 떡갈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나무들과 야생화에서는 이미 가을의 냄새가 나고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도토리나무 사이를 다람쥐 한마리가 살그머니 나타났다가 인기척에 놀라서 폴짝거리며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바람이 쏴아 불어오면서 이 계절이 나를 너무나 외롭게 만들어 주었다. 친구가 몹시 보고 싶고 그리워졌다. 생과 사의 이별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겨우 이순을 넘기면서 남편과 자식을 두고 세상을 등지는 게 말이나 되나.
살아도 아직 한참을 살 나이에 이리도 허망하게 가다니. 이리도 허망하게.
그러나 몹쓸 병은 그녀를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무슨 병인지 알았을 때는 이미 말기 암이었다. 그것도 난치병이라는 급성 뇌종양이었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 본 것은 대구의 모 병원이었는데 링거와 몰핀으로 몸과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거기다 정신도 오락가락 하는 형편이라 간병하는 딸애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프기 전에는 무척이나 예쁘고 긴 손가락에 희고 갸름했던 손이 큼직하게 변해 버린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만져 보니 주사약 때문에 부어서 그런지 마치 커다란 군용 장갑을 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오락가락하는 정신에도 정확하게 내 이름을 불러서 가슴이 찌르르했다. 함께 복도를 한 바퀴 걸을 동안 몇 번이나 쓰러질뻔 하면서도 계면쩍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기도 또렷하게 못 느끼면서 아마도 친구한테 이런 자기의 모습을 보이는 게 쑥스러웠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녀는 우리 곁을 떠나고 땅에 묻혔다. 흙이 그녀 위를 덮고 몇몇 사람들이그 위를 밟고 또 밟았다. 그러는 중에 죽음은 이렇게 우리를 저 세상과 이 세상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마냥 슬퍼할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해 보았다. 나도, 너도, 우리들 모두 언젠가는 가야할 그곳으로 간 것 뿐이다. 보고, 만나고, 얘기하고, 수다 떨고, 간혹 마음에 안 드는 사람 험구도 좀하고, 이런 것들을 함께 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는 것뿐, 마음 속에는 그 친구가 항상 담겨져 있고 좋아하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화사하고 늘 웃음 짓던 그 얼굴도 마음의 눈으로 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친구 숙을 그곳에 두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집으로 오는 동안 내내 좋은 곳에 가서 영면하라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여전히 화사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던 영정속의 친구를 눈으로 하직하면서 뒤 돌아 세상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만은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비가 오면 그 친구가 빗물에 떠내려 갈까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이젠 영원 속에서나 만나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안녕, 안녕, 먼 후일에 다시 만나자. 친구야.
2002년 9월 어느 날 친구를 영원히 떠나보내면서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