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을 걷는다
김선자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나서면 작은 숲길이 나온다.
단지 마다 조성된 산책길이다. 여러 종류의 나무가 심겨져 그늘이 짙고 가볍게 걷기가 좋다. 길옆에는 무궁화가 죽 늘어서 있고 꽃들이 피어 있다. 무궁화는 비록 수수한 모양의 꽃이지만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오래도록 꽃을 피운다. 무궁화는 국화(國花)이면서도 한때는 다른 꽃에 밀려서 환영을 못 받아 보기가 드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길옆이나 공원 등 어디를 가나 자주 볼 수 있고 이웃 사람을 본 듯한 모습이다.
이 무궁화는 누구나 좋아하는 꽃은 아닐 것이다. 꽃이 예쁘다거나 향기가 진하다거나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주변에서 늘 보고 살았기 때문이리라. 봄부터 가을까지 흰색, 연보라색 꽃이 피고 지고하여 오래도록 꽃을 볼 수는 있지만 꽃이나 잎에는 진드기나 벌, 벌레들이 곰지락거리고 있어서 근접하기가 어렵고 또 눈에 확 띄는 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꽃나무 곁을 지날 때면 세수를 자주 안 해서 좀 지저분한, 그러면서도 너무나 수줍은 어릴 적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수줍고 눈에 잘 안 뜨이는 그 친구가 참으로 좋아서 늘 함께 소꿉놀이를 하곤 했다. 우린 여보, 당신하면서 놀았는데 신랑 각시 역은 자주 바꾸었다.
우리가 돌멩이를 깔고 앉아서 놀던 곳은 감나무 밑이었다. 감나무 잎은 뜯어서 바지, 저고리를 만들기도 하고 돌에 콕콕 찧어서 밥이랑 반찬을 만들기도 했다. 그 때 쩝쩝하면서 맛보던 그 맛은 지금도 군침이 돌게 하는 일품 요리였다.
감꽃이 하늘거리며 떨어지면 치마에 주워 모아서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서로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때 친구의 모습은 너무 밝고 환해서 우리는 마주 쳐다 보며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내 유년의 친구, 일곱 살도 안 된 우리들이 놀 던 그 감나무는 가을이면 빨갛게 익은 홍시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가계에 보탠다고 어머니는 늘 누에를 치셨는데, 뽕나무 가지를 꺾어 오시면 오디부터 골라서 먹었다. 달콤하면서도 떨떠름한 맛이 나던 까맣게 익은 열매보다 약간 새콤한 덜 익은 오디가 맛이 더 있었다. 많이 먹으면 입안이 아리고 간혹 배가 아프기도 했다. 잎을 따서 누에에게 먹이면 희고 보들보들한 누에는 곰틀거리며 목을 쭉 빼고 뽕잎을 갉아 먹었다. 사 각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어느 날 뽕 나무 가지를 꺾으러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서 산엘 갔다. 길을 알아 논 후에는 산엘 혼자 올라가서 뽕나무에 오르기도 하고 그 밑에 앉아서 오디를 맘껏 따 먹기도 했다. 한번은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며 놀다가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니는 가족들의 목소리에 그만 울어 버리고 말았다. 혼이 날까 겁이 나기도 하고 따뜻한 사랑도 느꼈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길을 걸으면 느닷없이 지난날들이 떠올라서 추억에 젖게 한다. 무궁화에 얽힌 생각은 언제나 운동장이다. 달밤, 거뭇거뭇한 나무 그림자, 누르스름하게 빛나던 운동장의 흙, 그 위를 달리면서 소리를 지르던 우리, 무궁화는 꽃잎을 접고 말없는 응원자처럼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