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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산문

장다리꽃/김선자

by 김선자 2022. 10. 19.

장다리꽃

 

김선자


   어두우면 더 환해지던 별빛 때문에 조금은 쓸쓸해지곤 했습니다. 별들의 침묵은 시나브로 희미해져가고 거무스름한 나무는 반들반들 손때가 묻어 호롱불 아래서 반짝거리고 수런대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어머니가 베틀 앞에 앉으시면 비단 무명이 생으로 녹아들어 삶의 방향을 틀어 주곤 했습니다. 낡은 베틀이 치커덕거리던 소리에 싸리문 앞에서 졸고 있던 삽사리도 고개를 주억 거렸습니다.


   어둠이 빨아들인 기억은 또렷하여 철 지난 눈 길 저쪽에서 구비돌아 왔습니다. 베틀에 앉아 자주 부르시던 어머니의 노래는 둠벙에 빠져 쏙독거리던 쏙독새처럼 들렸습니다.  어화 벗님네야 꽃구경 가세 송홧가루 날리는 뒷산으로 가세 진달래 화전 부쳐 온 동네 나눠 먹세 벌나비 호랑나비 짝을 지어 날아드는 앞마당 꽃밭에 모여 앉아 보세


   뒷밭 장다리꽃이 화들짝 피어났습니다. 들녁 수수꽃다리 고개를 살랑거리며 땅을 향했습니다. 생을 엮어가던 어머니의 놀이기구 베틀에 앉아 부르시는 노래는 만리 구만리 구천을 달려 갔습니다. 봄이면 철쭉꽃 여름이면 목화송이 수줍게 피어나던 머루랑 다래랑 얽히던 골짜기에서 노래 소리 칡넝쿨에 걸려 올라가지 못할까 푸드득 거리던 수꿩에 빼앗길까 산속을 흘러내리는 계곡 물 소리에 풍더덩 빠져 버릴까 어머니 노래는 안절부절 아득해져 갔습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베틀위의 어머니는 비단이 되고 무명이 되고 식구들 옷이 되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 행여나 추위에 떨지나 않을까 혹시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나 않을까 어머니는 명절이면 색동옷 철철이 갈아 입히셨습니다. 어머니 구부정한 등 뒤에서 장다리꽃이 뱅글뱅뱅 한들거렸습니다. 버선발에 멍이 퍼렇게 든 발톱 한 다리는 베틀을 누르고 한 발은 장단을 맞추시며 뒷산 숲을 헤매듯 천리길을 달리듯 베틀을 몰고 가시던 어머니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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