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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글175

앉은뱅이저울/함민복 2011년 제6회 윤동주 문학상 앉은뱅이저울 함민복 물고기 잡는 집에서 버려진 저울 하나를 얻어왔다 저울도 자신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양 옆구리 삭은 저울을 뒤집는다 삼 점 칠 킬로그램 무한천공 우주의 무게는 0이더니 거뜬히 저울판에 지구를 담은 네 무게가 지구의 무게냐 뱃장 크다 지구에 대한 이해 담백하다 몸집 커 토막 낸 물고기 달 때보다 한 마을 바지락들 단체로 달 때 더 서러웠더냐 목숨의 증발 비린내의 처소 검사필증, 정밀계기 딱지 붙은 기계밀정아 생명을 파는 자와 사는 자 시선의 무게에서도 비린내가 계량되더냐 어머, 저 물고기는 물속에서 부레 속에 공기를 품고 그 공기를 제 무게를 달더니 이제 공기 속에 제 몸을 담고 공기 무게를 달아보네 봐요 , 물이 좀 갔잖아요 푸덕거림 버둥댐 오.. 2022. 10. 9.
첫 눈 오는 날/곽재구 첫 눈 오는 날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 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2022. 10. 9.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류시화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류시화 시월의 빛 위로 곤충들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개 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봐 이 모든 것들 위로 넌 아직도 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2022.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