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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글175

햄버거에 대한 명상― 가정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가정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 장정일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오늘 내가 해 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그러면서도 맛이 좋고 영양이 듬뿍 든 명상어쩌자고 우리가 가운데서빠질 수 있겠는가?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먼저 필요한 재료를 가르쳐 주겠다. 준비물은햄버거 빵 2버터 1½큰 술쇠고기 150g돼지고기 100g양파 1½달걀 2빵가루 2 컵소금 2 작은 술후춧가루 ¼작은 술상추 4 잎오이 1마요네즈소스 약간브라운소스 ¼컵위의 재료들은 힘들이지 않고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믿을 만한 슈.. 2024. 5. 17.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백주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백주은 세상이 하 수상하여 도 닦는 기분으로 두문불출, 면벽하다 간만에 집을 나섰더니 거리에서 누가 묻는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길에서 마주 서 있는 사람에게 이 무슨 어색한 질문일까. 점잖게 타이르려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는 질문과 놀거나 쉬고 있다는 대답들이 그 무슨 서류가 된 듯싶네. 하 수상한 세월 탓에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버린 것일까? 주고받는 대화들이 온통 선문답이 아니면 동문서답 형이니 시대가 만드는 게 영웅만은 아닌가 싶네. 그래 세월이여 흘러가거라. 풍파여, 부서지어라. 이 몸은 남겠노라, 나의 벽 앞에 2024. 4. 15.
제비꽃 여인숙/이정록 제비꽃 여인숙 이정록 요구르트 빈 병에 작은 풀꽃을 심으려고 밭두둑에 나가 제비꽃 옆에 앉았다 나잇살 먹었는지 꽃대도 제법이고 뿌리도 여러 가닥이다 이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한 송이는 하늘 쪽으로 한 송이는 포대기 속 잠결 아래로 그리고 또 한 송이는 곁에 있는 감나무 가지를 향하고 있다 저 감나무에 올라 울음보를 터트릴 거라고 입술을 떠는 꽃잎들 어떻게 본래의 이부자리대로 제비꽃을 심어놓을 것인가 요구르트 병 허리를 매만지다가, 안에 고여 있는 젖 몇 방울을 본다. 몸통만 남아 있는 불상처럼, 지가 뭐라고 젖이 돌았는가 울음보만 바라보며 몇 년을 기다려온 굼벵이 그 아름다운 허리를 오래 내려다본다 할 말 아끼다가 멍이 든 제비꽃에게도 합장을.. 2024. 4. 6.
수 련/채 호 기 수 련 채 호 기 안개 낀 새벽에 수련의 저 흰 빛은 수련이 아니다. 누가 공기의 흰 빛과 수련의 흰 빛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부풀어오르며 대기를 가득 채우는 수련, 공기처럼 형태도 없이 구석구석 끝도 없이 희게 빛나는 수련이여! 안개 낀 새벽에 공기는 수련처럼 희게 빛나다가 물처럼 푸른 두께로 출렁인다. 수련은 창틀 없는 유리처럼 푸른 깊이의 메아리. 물이 저 밑바닥의 내면으로부터 물풀을 흔드는 물고기 헤엄치는 혀로 푸드덕 말을 할 때 솟아오르는 커다란 공기 구릉―수면을 깨뜨리는 흰 포말 흰 파편은 수련, 물-말이 깨어져 날카롭게 빛나는 흰 수련! 수련 주위의 보이지 않는 저 공기는 수련의 생각들이다. 우리가 글자를 읽어나갈 때 우리 주위에서 태어나는 생각의 파동들처럼. 2024.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