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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기333

목요일/허연 목요일허연사람들 틈에 끼인살아 본 적 없는 생을 걷어 내고 싶었다.모든 게 잘 보이게다시 없이 선명하게난 오늘 공중전화통을 붙잡고모든 걸 다 고백한다.죽이고 싶었고사랑했고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는성경 구절에도마음이 흔들린다고.그리고 오늘은 목요일.죽이 끓든 밥이 끓든나는 변하지 못했고또 목요일.형상이 없으면 그림이 아니야.따귀 한 대에 침 한 번씩 뱉고 밤을 새우면신을 만날 줄 알았지.그림 같은 건잊은 지 오래라는 녀석들 몇 명과그들의 자존심과그들의 투항과술을 마신다.그중에 내가 있다.오늘은 목요일.결국 오늘도꿈이 피를 말린다.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 2025. 4. 22.
정지용문학상, 시인 허연 ‘작약과 공터’ 정지용문학상, 시인 허연 ‘작약과 공터’더리포트입력 2025.04.15 14:24시인 허연(59)의 시 ‘작약과 공터’가 제37회 정지용문학상을 받는다.작약과 공터허연진저리가 날 만큼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작약은 피었다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죽은 참새 사체 옆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이거나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슬픈 태도 같다.아이의 허기 만큼이나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작약은 울먹거림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작약에는 잔인 속에는 고요가 있고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책임을 진다공터 밖으로 전해지면 너무나 평범해져버리는 고요 때문에작약과 나는 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 놓았다작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 2025. 4. 21.
그렇게 몇 포기/오규원 그렇게 몇 포기 오규원 길이란 우리들 습관의 다른 이름길에는 풀이 나지 않습니다우리들 고정 관념에 향기 한 줌나지 않듯 그렇게.그러나 길에도 풀이 납니다失手처럼그렇게 몇 포기모진 꿈처럼그렇게 몇 포기.그러나 길에는 풀이 납니다.여기 한 포기저기 한 포기미친년처럼 그렇게 몇 포기..............................산으로 오르는 길이 녹음 짙어진 나무 그늘 속으로 숨더니 며칠 사이에 보이지 않습니다. 건너 쪽 산을 빠져 내려온 길이 구부러져 마을로 내려가는 모습 다정합니다. '길'이라는 말처럼 풍요로운 의미의 말도 없지요. 길 위에서 나서 길 위에서 죽는다는 말은 그래서 사실이기도 하고 상징이기도 한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산천에 순응해 살던, 인류가 아직 '젊던 시절'의 부드러운 .. 2025. 4. 16.
신달자 시인 “비가 손을 적시는데 등이 따스하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2025.04.11 내 앞에 비 내리고신달자밤새 내리고 아침에 내리고 낮을 거쳐 저녁에 또 내리는 비적막하다고 한마디 했더니 그래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계속 보여 주는구나고맙다, 너희들 다 안아 주다가 늙어 버리겠다 몇 줄기는 연 창으로 들어와반절 손을 적신다 손을 적시는데 등이 따스하다죽 죽 죽 줄 줄 줄 비는 엄마 심부름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고춤추듯 노래하듯 긴 영화를 돌리고 있다 엄마 한잔할 때 부르던 가락 닮았다큰 소리도 아니고 추적추적 혼잣말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비이젠 됐다라고 말하려다 꿀꺽 삼킨다 저 움직이는 비바람이 뚝 그치는그다음의 고요를 무엇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표현이 막막하다.--------------------------------------------------------하루 종.. 2025. 4. 12.
대구신문 <좋은 시를 찾아서>485 문현미 시인 바람의 길/문현미그들의 뼛속에는약속의 땅으로 가야 할 바람이 새겨져 있다간절한 바람을 제대로 읽지 못한나, 이제 허겁지겁 바람의 뒤축을 좇아수천, 수만 겹 바람 속을 걸어가고 있다바람의 옷을 입고 벗으며수없는 그늘의 날들이 맥없이 오고 갔지만흰옷을 즐겨 입던 겨레의 새벽을 여는바람은 설령,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 해도닿을 수 없는 천상의 것이어서바람 앞에 선 나는한낱 어리석은 누추일 뿐이다바람이 분다오늘도 그 바람의 시간으로 살아야겠다그립고 아득한 숭고의, 그 길을ㅡㅡㅡㅡㅡ□약력:1998년 계간『시와 시학』으로 등단. 독일 아헨대학교 문학박사, 독일 본대학교 교수 역임. 박인환문학상, 풀꽃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수상. 시집『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사랑이 돌아오는 시간』,『몇 방울의 찬란』칼럼집 .. 2025. 4. 9.
빈집 / 기형도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문학과지성사/1989 2025.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