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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글

제비꽃 여인숙/이정록

by 김선자 2024. 4. 6.

제비꽃 여인숙


이정록


요구르트 빈 병에 작은 풀꽃을 심으려고
밭두둑에 나가 제비꽃 옆에 앉았다
나잇살 먹었는지 꽃대도 제법이고 뿌리도 여러 가닥이다
이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한 송이는 하늘 쪽으로
한 송이는 포대기 속 잠결 아래로
그리고 또 한 송이는 곁에 있는 감나무 가지를 향하고 있다
저 감나무에 올라 울음보를 터트릴 거라고 입술을 떠는 꽃잎들
어떻게 본래의 이부자리대로 제비꽃을 심어놓을 것인가
요구르트 병 허리를 매만지다가, 안에 고여 있는 젖 몇 방울을 본다.
몸통만 남아 있는 불상처럼, 지가 뭐라고 젖이 돌았는가

울음보만 바라보며 몇 년을 기다려온 굼벵이
그 아름다운 허리를 오래 내려다본다
할 말 아끼다가 멍이 든 제비꽃에게도 합장을 한다
문득 내 손가락의 실반지 그 해묵은 뿌리에 땀이 찬다
제비꽃 아래의 고운 숨결에 동침하고 싶어
내 마음 감나무 새순처럼 윤이 난다

흙 속에 살되 흙 한 톨 묻히지 않고, 잘 주무시고 계신다
이미 흙을 지나버린 차돌 하나,
살짝 비껴간 뿌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먼 훗날의 제 울음주머니만 굽어보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여러해살이라고, 그리하여
차돌 같은 사리로 마음 빛나는 것이라고



<제20회 김수영문학상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