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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산문

목단/김선자

by 김선자 2022. 11. 19.

목단

 

김선자

 
 
   몇 년 전 민화를 배운 적이 있다.
   한지에 본을 그리고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다. 여러 장의 그림 중에서 목단을 골랐다. 꽃은 세 송이며 색깔이 빨강과 주황 노랑이고 잎은 밝은 초록색이었다. 수채화나 유화를 그릴 때는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한 후 색칠을 하는데, 여기서는 이미 복사된 것 위에 한지를 놓고 본을 떠서 색을 칠하였다. 가르치는 강사는 색만 칠할 것이 아니라 우선 조화부터 생각하라고 했다.     
   색은 묘한 정감과 에너지가 서로 간에 밀치고 잡아당겨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떤 묘한 힘이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시회 관람을 가보면 어떤 색은 한데 어우러지고 어떤 색은 서로 거부하면서 배척하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아주 놀랄만한 조화와 균형을 만들었다. 이들 색은 붓을 놀리는 사람과 잘 맞으면 더욱 아름답고 멋진 그림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특히 색과 색을 섞어 쓸 때는 저희들 끼리 몸을 녹이면서 자기들과 생판 다른 색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한 융합 속에서 그림은 더욱 돋보이는 모습이 되는 것 같았다. 마음에 맞지 않으면 등을 돌리는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한지는 물감을 잘 빨아 들였다. 빨강색으로 목단을 먼저 그렸다. 처음엔 연한 색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차츰 차츰 진한 색으로 꽃잎 하나하나의 음양을 그려 넣었다. 탐스런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잎은 진한 초록색과 연한 초록색으로 그려 넣고 대궁은 고동색으로 칠했다. 선명한 색으로 인해 꽃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 아름다웠다. 노란색 꽃과 주황색 꽃은 처음 빨강색 꽃 보다는 수월하게 그렸다. 민화는 색은 단순해도 오랜 시간 집중해서 색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엎드려 색칠할 때는 머리가 아프고 눈도 침침해졌다. 유화처럼 덧칠이 없으니까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가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될 때도 있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과 나는 색깔이 다르다고 말한다. 공동체 안에서도 색이 비슷한 사람끼리만 어울리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모양뿐만 아니라 배경, 성장, 학력 등이 같지 않으면 색이 다르다, 성향과 사고하는 방향이 다르다고 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어울리지 않으려고 핑계를 댄다. 유독 색의 차이를 심하게 느끼면 어지간해서 화합을 이루어 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건 아마도 색으로 말하자면 보색 관계가 되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보색은 색상환에서 가까이 있지 않고 반대편에 있다. 어찌 보면 마주 앉아서 서로 눈치를 보는 듯하고 경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처럼 대비 되는 색을 나란하게 쓴다면 생각 외로 선명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매우 강렬해 진다. 그들을 혼합하여 섞는다면 자기 색은 감추고 생판 다른 색을 만든다.
   파랑색과 주황색은 보색이다. 이들 색은 배타적이면서도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광고라든지 강조할 그림의 경우 잘 쓰이고 있다. 초록색과 빨강색도 보색관계이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주로 입는 녹의홍상인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는 우리나라 전통의상에서는 자주 쓰이는 색이다. 명절 때 입는 어린이 색동저고리는 알록달록한 원색들이 서로서로 이웃 색을 밀어 내지 않고 정답게 섞여있다. 만약 사람에게서 반대색은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강렬한 보색 관계가 되어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더 아름다워 보이고, 다른 사람 때문에 나의 존재 가치가 더 드러나 보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하고. 그러나 사람은 그림의 색과는 달리 서로에게 잘 적응하지 못하고 화합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을 자주 보고 경험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밖은 해거름이어서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방안의 가구들은 어슴푸레하게 실루엣만 보였다. 시나브로 어두워졌다. 개의치 않고 책상에 앉아서 그림을 그릴 도구들을 준비했다. 아크릴 물감이 없어서 수채화 물감을 꺼내고 팔레트, 붓, 물통, 한지를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붓을 들고 색을 골라서 칠하기 시작했다. 어울림을 종이 위에 만들어 갔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목단을 먼저 그렸다. 목단은 우선 색이 화려했다. 너무나 고아서 마음마저 활짝 밝아지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들뜨지 않고 고요한 가운데 고요함 속으로 차츰차츰 빠져 들어갔다. 목단 세 송이가 다 그려졌다. 원색이 주는 단순함과 깔끔함에 스스로 놀랐다. 예뻤다.
   나비가 오지 않고 향기가 없는 꽃이라 해도 목단은 화려하면서도 그 풍요로운 모습의 위풍이 품위가 있다. 행복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마치 맑은 강물에 몸이 잠긴 것처럼 아늑해 졌다. 깊은 사색의 경지로 이끌렸다. 목단 그림은 그렇게 내게 왔다. 색들은 제 자리를 지키며 서로에게 양보하고 조화를 이루었다. 마치 자식 한명이 탄생한 듯 뿌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림을 소중히 다독거렸다.
   살아온 내 삶의 흔적들도 꽃 그림처럼 색을 칠하고 다듬고 싶은 갈망이 불현듯 일었다.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 한 폭의 생. 성과 속이 한데 어우러진 다정다감한 내 삶을 목단 그림에서 보았다. 그 꽃 위엔 나의 삶을 그렇게 그리고 싶은 다짐과 꿈도 실려 있었다. 삶도 그릴 수 있는 그림인 것처럼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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