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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산문

붉은 모랫벌/김선자

by 김선자 2023. 4. 7.

붉은 모랫벌

 
 

김선자
 
 
 

그해 여름은
전쟁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던 때였지.
우리는 하루 백리길을 걷고 또 걸었어. 
망개덩굴이 산기슭을 휘덮고
산새가 우우우 울어대는 금방이라도 늑대가 나올 것 같은 산 길,
타박타박 걸어 고향을 찾아 가던 그 날이
옆구리에 낀 가방 안에서 다람쥐가 뛰어 나오듯 달려 나오네.
전쟁이 무서워 숨어 다니며 하루하루 헤매던 산과 들에서
나만이 아는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가
나랑 반 백 년을 함께 한단다.
누렇게 익어가는 밀 이삭을 불에 살짝 구워 호호거리며 먹던 맛이랑
목화밭 지나며 똑 따서 먹던 달래 맛이랑
뱀이 알을 슬었다는 작은 도랑물에 미숫가루 타먹던 일은 잊을 수가 없어. 
지나가던 마을에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했던 초가 집,
그 집 처녀는 너무 하얗게 분을 발라 백년 묵은 여우가 둔갑한 사람이라고 하며 오빠는 겁을 주었지.
치마 밑에 감춰 둔 꼬리가 백 개나 된다고 하면서.
구르기를 자꾸 하면 여우가 된다나.
그때 가슴 조이며 바라보던 저녁놀은 너무 아름다웠어.
 
얘야,
물이 바싹 말라 버린 냇가 모랫벌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단다.
비행기 한 대가 낮게 내려와 폭모래에 작은 구멍을 파고 가더라.
콩이 튀어 날아가는 줄 알았지.
배가 불룩한 아주머니가 픽 쓰러질 때도 우리들 보라고 재미나게 장난치는 줄 알았단다.
콩 밭으로 튀어오빠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어.
동생과 나는 콩밭으로 달음질치듯 달려가 콩밭 골에 엎드려 코를 박고 두손으로 귀를 막고
훅훅 덮쳐오는 더운 여름의 흙냄새를 맡았지.
콩 잎도 무서운 듯 바르르 떠는 소리가 들렸어.
전투기의 요란한 소리에 파묻히며 어디선가 신음하는 여자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 왔단다.
우리는 간신히 일어나서 똑바로 서서 보았단다.
안 볼 수가 없었어.
뜨거운 태양 아래서 들려오던 간장이 에이던 고통의 소리.
뜨거운 모래를 흥건히 적시고 있던 붉은 물.
흘러내리던 뱃속의 생명줄.
냇가의 모랫벌은 씻길 수 없는 전쟁의 핏자국으로 얼룩이 지고
우리는 핏기가 가신 새하얀 얼굴로 그 곁을 태연한 척 지나가고 말았단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후들후들 비실거리며 겨우 걸음을 내 디딜 정도로 마구 떨렸어.
펄펄 끓는 여름 햇살에 여자와 뱃속에서 흘러내린 아기만 오두마니 모래위에 남겨두고
우리는 뒤 돌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단다.
고등학생인 오빠는 열살도 채 안된 어린 동생 둘이 쓰러질까봐 태연 한 척 했지만
얼굴은 파랗게 굳어 있었어.
 
우리는 수숫대가 머쓱하니 서있는 들판을 지나
느티나무 수양버드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방천둑에 올라
강아지풀이 고개를 숙인 풀섶에 털썩 주저앉았어.
피곤이 나른하게 물밀듯 몰려 와서 오직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어.
향긋한 수박냄새가 나는 풀잎을 뜯어 손바닥에 올려 때리며
수박이 맛있나참외가 맛있나하는 놀이를
두 살 아래인 동생과 즐기고 싶었단다.
전쟁이 피해 간 마을을 찾아 가고 싶었던 거야.
서쪽 하늘에 노을이 붉게 피빛처럼 붉게 타 오르다가 사그라질 때까지
우리들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눈은 먼 곳을 바라보며 걷고 또 걸었단다.
어둠이 서서히 사방에 퍼지고 여름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깊어 가고 있었어.
비행기가 사라진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하더라.
 
얘야,
나의 그해 여름은 여기서 머물러 버린 듯하다.
키가 크지 않은 하나의 이야기가 구슬픈 노래처럼 내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다.
긴 탯줄 같은 두려움이 여태 없어지지 않고 붉은 모랫벌에 닿아 있지만
여름밤의 아름답던 별들과 수박향 나던 풀포기들도 함께
내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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