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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시 273

야누스*/김선자 야누스* 김선자 긴 혀가 두 가닥으로 보였다 나불거렸다 광고지처럼 가늘게 뜬 눈의 초점이 흐려진 그녀 뜯겨진 달력 틈 사이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산 그림자 희미한 호수위로 비껴가는 노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빨갛다 그녀는 그녀 뒤로 소리없이 돌아섰다 도마뱀처럼 냄름거리는 긴 혀 말 타고 달리는 기사처럼 바다사자처럼 해변에서 파도에 잠깐 밀려갔다 되돌아오고 그녀는 소라등의자에 앉아 바람과 함께 노래 부르고 나란히 함께하는 두 가닥의 혀 혀 뒤에 가득 고여 있는 비린내 나는 거짓 혀는 혀 그대로 참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녀의 혀는 그녀의 혀 뒤에서 굳어 가고 있었다 야누스*하고 불렀다 *야누스 : 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의 신 2023. 11. 15.
익숙하다/김선자 익숙하다 김선자 더듬어 시집을 머리맡 책들 위에 두고 스탠드 전등을 끄고 주섬주섬 책갈피를 끼운다 두 눈 대신 두 손이 눈이다 어둡다거나 밝다거나 하는 건 일상에 젖은 습관일 뿐이다 시각이 촉각에 양보하기만 하면 눈을 감아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 조금 전 읽었던 시 구절 끼고 있던 돋보기안경 놓인 자리 옷이 걸린 옷걸이 책상 컴퓨터 티브이 액자 시계 어둠속에서도 밝게 보이는 것들 익숙하다 온몸이 눈이다 그 중에 가장 또렷한 눈은 두 손이다 오늘도 이 두 손이 하는 일 욕망의 골짜기 빈 손이 될 수 없다는 듯이 쥐었다 폈다 한다 2023. 11. 15.
입력/김선자 입력 김선자 어제 퇴근 입력 신호가 없습니다 외부기기 전원상태 케이블 정상 돈은 피, 피는 힘듦, 문자가 옵니다 연결 여부 확인하세요 tv/외부입력 키 누르세요 피로는 삶의 무게 몇 킬로그램입니까 해당 입력으로 어디로든 전화하세요 널부러진 날 입력된 계획이 없다구요? 무기력합니까 치세요, 타닥타닥 두드리세요 해당 입력, 삶이 전환, 날씨 화창, 운수 대통, 케이블 비정상 연결 엔터키 작동 중지 마우스 도망갔어요 수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곧 당신의 모든 내장이 낱낱이 파 헤쳐 질 것입니다 피는 고통, 힘듦, 죽음의 공포, 입력하세요 내부기기 연결 정상 완료 오늘 출근 2023. 11. 15.
레테의 강/김선자 레테의 강 김선자 겨울의 걸음은 모데라토다 알레그로로 숨이 가빠진 대지 할딱거린다 감춰야 하는 것들 손을 저으며 내리는 흰 눈으로 은은하게 감싼다 비올라의 음이 높이 오르기 전이다 나뭇가지에 바람이 부러지기 전이다 겨울은 팔을 감추며 지그시 눈을 감고 싶어 한다 흐느적거리던 것들 찢어지는 심벌즈의 음으로 울부짖는다 가슴의 멍울이 터지기 전이다 도돌이표로 구슬픈 음이 계속 되기 전이다 차가운 겨울은 낮게 더 낮게 내려가고 싶어 하는 은둔자다 아다지오로 와서 숨이 가쁜 하늘 구름 바람 햇빛 포르테로 포르테로 겨울은 힘을 키운다 심상치가 않다 문을 열었다가 문을 닫아본다 소프라노에서 베이스로 영상에서 영하로 안단테에서 라르고로 쉬엄쉬엄 대지 속으로 굴을 판다 두꺼비 개구리 뱀 집을 찾으러 간다 여린 음향이 가.. 2023.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