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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시 154

반짇고리/김선자 반짇고리 ㅡ바늘 敍事 ‧ 23 김선자 바늘은 반짇고리 안 폭신한 솜 주머니에서 쉬고 있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바느질하다 꽂아 둔 바늘 긴 목 꼿꼿이 세우고 가막소에 있는 듯 온벙어리 되어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어 안절부절 이었다 바늘이 꽂이에서 뽑히는 순간이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우쭐거리고 싶어 체신머리없이 의뭉하게 접었던 날개 활짝 펼치고 날아다니는 날이 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래사장 새 발자국처럼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콕. 콕. 찍어 논 발자국 여인의 손에 매달려 어디든 가고 싶은 파도치는 바다든 울울창창한 숲길이든 호르르호르르 날아만 가면 좋을 것 같은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9.
실꾸리/김선자 실꾸리 ㅡ바늘 敍事 ‧ 22 김선자 동그란 실꾸리 하나 굴러 간다 · 살아오면서 불끈거리던 분기 돌돌 감기며 따라 간다 터진 가슴의 솔기 휑하니 바람만 모으던 앙상하던 갈비뼈 사이사이 매달리던 울음소리 겉옷으로 감싼다 갈마들던 개구진 하늘 낯선 손님처럼 세우고 떠나보내고 봄비 요동치던 삼월 뱃속 혹 떼어내고 찢어진 뱃가죽 꿰매고 올게 한마디 툭, 던지고 집 나서던 새벽 손바닥에는 주름이 된 날짜 모이고 오랫동안 그리도 먼 길이어서 기별 없이 기다리던 날개는 접는다 피 묻은 실밥 자국 이승을 훌쩍 떠난 둥근 실꾸리 사방이 사각인 반짇고리 안에 반듯이 눕는다 문이 닫힌다 이승과 저승 사이 굴러간다 소리없이 굴러간다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9.
베틀/김선자 베틀 ㅡ바늘 서사 16 김선자 어두울수록 더 환하던 밤 거들먹거리고 거뭇거뭇 손때 묻은 나뭇결 둠벙에 자주 빠져 쪽쪽쪽거리던 귀에 익숙한 쏙독새노래 흥에 겨워 베틀에 오르고 내리고 힘든 줄도 모르던 능숙하게 짠 올 고운 무명베 한 필 식구들 골고루 옷 지어 입히던 장다리꽃 닮아 가던 할매 할매 주머니에 가득한 장다리꽃 씨앗 씨앗하나 하나 다정한 손길로 다독거리며 나직나직 중얼 거리던 다정한 할매 웃음도 설움도 즐거움도 시름도 고달픔도 다 잊어버리고 눈물주머니 속에서 짜여 지던 베 한필 장다리꽃 필 무렵 무명 베 감고 먼 하늘 길 훌쩍 떠난 할매 베틀도 서운한지 자주 삐걱거린다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9.
인두/김선자 인두 ㅡ바늘 서사 14 김선자 너는 지난 날 네가 한 일 기억할 것이다 뜨거운 불덩이에서도 꿋꿋이 견딘 너는 소소한 일에 마음이 들떠서 가슴에 자국을 내고 말았지 누렇게 타다 만 너의 흔적은 종일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노인의 얼굴처럼 희떱다 식었다 뜨거워졌다 몇 차례 숨바꼭질하고 나면 아, 이까짓 자국에도 얼굴 붉힐 일이 괴로워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는다 휘돌이하는 열병처럼 순대 속처럼 만두 속처럼 그렇게 화롯불 위에서 지내는 것이다 너는 가만있어도 입이 뾰족해서 도톰한 헝겊으로 감싸 주고 싶었다 그것이 너에게 들려 줄 나의 노래다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