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선자의 시 154

다듬이/김선자 다듬이 ㅡ바늘 서사 12 김선자 창호지 바른 창문에 그림자 어른거리는 어머니 손놀림이 있어야 한다 호롱불에 비치는 두 방망이가 있어야 한다 고깔 쓴 여인의 나비춤이 있어야 한다 길고 짧고 길고 짧고 둔탁하고 경쾌하고 빠르고 느린 때리면 때릴수록 고분고분해지는 나긋한 종아리도 있어야 한다 콩닥 콩다닥 콩닥 콩다닥 먼 데서 다리 절며 오시는 손님 풀 멕인 모시적삼도 두들겨야 한다 동해에서 잡은 명태도 마른 오징어도 두들겨 패야한다 소머리 돼지 머리는 다듬이 밑에 눌러서 숨죽여야한다 두들겨도 되는 것 뒤집어야 어깨가 가벼워 지는 창호지 그늘에 구멍이 숭숭 뚫려야 다듬이가 폭신해 지는 어머니는 그만 숨이 차서 가슴팍을 세게 두드려야 한다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9.
배내옷/김선자 배내옷 ㅡ 바늘 敍事 8 김선자 묽고 노르스름한 젖 희다 흰 알사탕 같은 기다림 가지런한 서랍에서 똑똑 꺼내 먹어요 탯줄 감긴 채 자라던 내일 누워서 흘린 땀방울 검은 똥 누런 똥 연달아 싸대는 오줌 흔적 아랫단 윗 단 떠나온 생 희고 흰 안에서 분홍 팔다리 헐렁헐렁 가비야이 파다닥거려요 아직은 저녁이 싫은 아직은 환해오는 새벽이 그리운 희고 흰 눈부신 아침 기다리고 있어요 끈끈한 양수에 던지고 온 그 한 생이 전생처럼 으앙으앙 버덩거리는 온통 하얗게 소리 내는 울음 배내옷 하루가 다시 희어지고 있어요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9.
벽/김선자 벽 김선자 달력 뒤장에 구멍이 났다 그리로 세월이 우르르 빠져 나가고 나간 날들은 돌아 올줄 모르고 달력이 걸려 있던 벽이 하얗게 질려 있다 벽은 자기를 가리고 있던 달력을 잡지 못하고 머물고 있던 세월조차 놓쳐버리고 그만 뻥 구멍이 뚫렸다 달력 뒷 발에 호되게 차인 벽 할 말을 잃어 가는 벽 하루가 나간 자리 천년이 온다해도 열 두달 감싸 안던 달력의 따스함 벽은 잊을 수 없다 만날 날 기다린다 조금씩 흔들린다 벽은 구멍난 달력 뒤로 넓은 세상 바라 보고 싶어 수 천년이 놀고 있는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2.
조침문弔針文 한 소절/김선자 조침문弔針文 한 소절 ㅡ바늘 敍事 · 7 김선자 얼룩진 몸 이제 가야 하는구나 싸락눈 싸랑싸랑 내리는 날이면 더 고적하던 밤 오롯한 친구이던 너 오호 통재라 그냥 이대로 또 한 번 너와 나 엮임의 길로 한 발 두 발 딛고 가야 하는구나 잘강잘강 흰 실 씹어 귀에 걸고 두 동강 난 너 보낸다 오호 애재라 비단실로 모란꽃 한 땀 두 땀 수놓던 여인들의 꽃물 연인 한 마리 나비 같은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