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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시 154

바늘의 길/김선자 바늘의 길 ㅡ바늘敍事 · 6 김선자 푹푹 내리는 눈발을 쳐다보며 순백이던 네 마음 생각한다 내 어머니 위해 너 있어 왔거니 처음과 끝이 이어지던 순결하고 고귀하던 너 손잡으면 녹아 버릴 것처럼 안녕, 안녕! 어머니 깊은 한숨 뒤로 돌아 가던 돌개바람 흰 눈 내리는 날 그냥 이대로 조침문 한 소절 외운다 헛헛해 하는 바늘아 저 눈 속으로 또 한 번의 무구함 속으로 가라 어머니 가신 길 그 길에 쌓이는 눈 길 따라 *조침문弔針文 : 조선 순조 때 유씨 부인이 지은 국문 수필. 바늘을 의인화하여 제문 형식으로 쓴 글이다.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2.
협심증/김선자 협심증 김선자 얼굴을 가린 검은 손 가슴을 행해 겨누는 총탄같은 두려움 가슴이 서서히 조여 갈 수록 그래서 무엇인가가 툭 끊어 질 것 같은 공포는 투명한 공기를 뚫고 나아가는 화살이다 이제는 대지와 집들과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몽롱함이 방안 가득 퍼진다 수수께끼처럼 생은 언제나 다음다음으로 이어지고 잠에서 깨어날 즈음이면 검은 손을 피해 허우적거리던 꿈속 자맥질 삶이 더러워도 지나칠 수 없는 그렇고 그런 일 등나무 꽃등 아래서 이제는 다시 너를 만날 수 없고 검은 손을 피해 베일에 가린 꽃향기처럼 오늘로서 이 세상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오슬오슬한 이야기 괴물로 바뀌는 꿈,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ㅡ시집 《어머니의 바늘》, (시와시학, 2019) 2023. 4. 22.
능금/김선자 능금 김선자 그대가 떠오르면 내마음은 늘 설렙니다 흙냄새가 나는 그대 태양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그대 달콤 쌉쌀한 향기 대지에 보내는 그대 나무 가지마다 벙글거리는 미소 그토록 뺨이 붉은 그대 수줍은 미소로 입가가 볼그레한 그대 오늘도 새들과 어깨동무하고 새들은 연신 재잘거리며 포로롱거립니다 보름달처럼 치오르는 그대 비바람 폭염에도 늠름하던 그대 온갖 벌레가 파먹어 온 몸이 곪아터져도 그들을 품어 안고 견뎌온 그대 한마디 군담도 없이 살갗은 짓무르고 피부가 병들어 반점이 생겨도 찡그린 기색 감추는 그대 씨앗을 꼭 끌어안고 연한 속살을 보듬습니다 씨앗 한 알에 그대가 넣어준 햇빛 바람 물 맑은 공기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는 솜털처럼 아삭아삭하고 구름처럼 매끄러운 그대는 태양의 알갱이 생명의 원천 내 마음.. 2023. 4. 22.
탄생/김선자 탄생 ㅡ바늘 敍事 ‧ 26 김선자 쓸쓸한 곳에 사는 너는 예부터 즐겨 입던 삼베 모시 광목 옥양목 양지쪽에 펴 놓고 흰 옷 바라기 눈부셔 하누나 삼신 할망 손 분주하더니 연한 꽃잎 찢고 너를 끄집어 내었도다 땅 김 오를 적 생겨난 너 복사꽃나무 밑에 오롯이 앉아 설문대 할망 거섬을 만들 적 생각하누나 할망 너를 안고 장대 같이 쏟아지는 오줌을 참지 못해 우도를 만들고 유채꽃 노랑향기 들이 마실 적 두 다리 나란히 이곳에 뻗고 거섬에서 홀로 머리 베고 누웠다가 땅을 짚고 일어서누나 삼신 할망 우뚝 서서 바다를 호령하누나 눈물로 바닷물 넘치게 하지 마라 동백꽃 똑 떨어질 적 할망 뜨거운 죽에 빠져 죽어버려 다시 살아나올 적 따오기 울음 울어 울었도다 할망 손에 기댄 채 너는 몇 만 년 동굴로 들어가려하누나 .. 2023. 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