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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글175

밥/나태주 밥 나태주 집에 있을 때 밥을 많이 먹지 않는 사람도 집을 나서기만 하면 밥을 많이 먹는 버릇이 있다 어쩌면 외로움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밥을 많이 먹게 하는지도 모르는 일 밥은 또 하나의 집이다 2024. 4. 6.
류시화, 「모란의 연(緣)」 류시화, 「모란의 연(緣)」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이 모란이 안다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 시_ 류시화 – 한국일보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인도 사상에 심취한 그는 여행과 명상을 통한 자기 탐구의 길을 걸으며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 2024. 2. 23.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성복(1959~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1959~ )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성기(性器)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 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春畵)를 볼 .. 2024. 2. 23.
녹색 두리기둥/김광규 문학과 의식 제 2회 시 당선작 녹색 두리기둥 김광규 전깃줄 끊긴 채 자락길 어귀에 시멘트 기둥으로 홀로 남은 전신주 담쟁이 덩굴이 엉켜 붙어 앞으로 옆으로 위로 퍼져 올라가 우뚝 솟은 녹색 두리기둥 만들어 놓았네 폐기된 전신주 꼭대기 담쟁이 더 기어 올라갈 수 없는 곳 바람과 구름을 향해 아무리 덩굴손 허공으로 뻗쳐보아도 이제는 더 감고 올라갈 기둥도 나무도 담벼락도 없네 살아있는 덩굴식물이 한 자리에 그대로 소나무처럼 머물 수 없어 제 몸의 덩굴에 엉켜 붙어 되돌아 내려오네 온갖 나무들 드높이 자라 올라가는 저 푸른 하늘에 앞길이 막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되돌아 내려오며 삶터 잘 못 잡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두리기둥 만들어 놓았네 《문학과의식》2012년 가을호 수상소감 담쟁이덩굴은 사람과 .. 2024.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