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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글175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이윤학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이윤학 집에 가는 오솔길이 있었다 길게 머리를 따 묶은 소녀가 있었다 유월의 풀밭 안으로 스며드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 딱딱하게 굳은 땅바닥 위에 떨어진 꽃 막대기가 있었다. 소녀는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꽃 막대기에 대한 소녀의 설렘! 손을 가져가자 꽃 막대기는 금세 꽃뱀으로 변했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2024. 4. 6.
자명한 산책/황인숙 자명한 산책 황인숙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낙엽들 햇빛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자명하고도 자명한 단단한, 블록 나는 자명함을 퍽!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2024. 4. 6.
개밥그릇 /함민복 개밥그릇 함민복 사월 초파일 傳燈寺에서 淨水寺까지 공양드리러 가는 보살님 차를 얻어 탔다 토마토 가지 호박 늦은 모종을 안고 십 리를 더 걸어와 흙 파고 물 붓고 뿌리에 마지막 햇살 넣고 흙 덮고 해도 燈 처럼 물[水] 처럼 날이 맑아 개밥그릇을 말갛게 닦아주고 싶었다 부처님 오신 날인데 나도 수돗가에 앉아 도(陶)를 닦았다 고개 갸웃갸웃 쳐다보던 흰 개 없다니까! 그 그림자가 그릇의 맛이야 수백 번 혓바닥으로 핥아도 아직 지울 수 없는 햇살이 담길수록 그릇이 가벼웠다 2024. 4. 6.
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외 4편/이기철 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외 4편 이기철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한 번도 바라보지 못한 짐승들이 즐거워질까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아직 만나지 못한 삶들도, 까치도 즐거워질까 급히 달려와 내 등 뒤에 連坐한 시간들과 노동으로 부은 소의 발등을 위해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를 빌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날들을 노래하고 싶다. 나이 먹기 전에 늙어버린 단풍잎들은 내 가슴팍을 한 번 때리고 곧 땅속으로 묻힌다. 죽기 전에 나무둥치를 감고 타오르는 저녁놀은 地上의 죽음이 저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치는 걸까 살이 연한 능금과 배들은 태어나 첫 번째 베어 무는 어린 아이의 갓 돋은 치아의 기쁨을 위해 제 살을 바치고 群集으로 몰려오는 어둠은 제 깊은 속에다 아직 밤길에 서툰 새끼 짐승을 위해 군데군데 별.. 2024.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