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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글175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시인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2024. 2. 23.
아니다 그렇지 않다/김광규 아니다 그렇지 않다 김광규 굳어 버린 껍질을 뚫고 따끔따끔 나뭇잎들 돋아나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 성난 함성이 되어 땅을 흔들던 날 앞장서서 달려가던 그는 적선동에서 쓰러졌다 도시락과 사전이 불룩한 책가방을 옆에 낀 채 그 환한 웃음과 싱그러운 몸짓 빼앗기고 아스팔트에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러가라 외치던 그날부터 그는 영원히 젊은 사자가 되어 본관 앞 잔디밭에서 사납게 울부짖고 분수가 되어 하늘높이 솟아오른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멋쩍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어느새 중년의 월급장이가 된 오늘도 그는 늙지 않는 대학 초년생으로 남아 부지런히 강의를 듣고 진지한 토론에 열중하고 날렵하게 볼을 쫓.. 2024. 2. 23.
라일락 전세/박지웅 라일락 전세 박지웅 라일락에 세들어 살던 날이 있었다 살림이라곤 바람에 뒤젖히며 열리는 창문들 비오는 날이면 훌쩍거리던 푸른 천장들 골목으로 들어온 햇살이 공중의 옆구리에 창을 내면 새는 긴 가지를 물어 구름과 집 사이에 걸었다 그렇게 새와 바람이 그린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따라가면 하늘이 어느덧 가까웠다 봄날 라일락꽃이 방 안에 돋으면 나는 꽃에 밀려 자꾸만 나무 위로 올라갔다 주인은 봄마다 방값을 올려 달랬으나 꽃 피면 올라왔다가 꽃 지면 내려갔다 오래전부터 있어온 일, 나는 라일락 꼭대기에 앉아 골목과 지붕을 지나는 고양이나 겸연쩍게 헤아렸다 저물녘 멀리 마을버스가 들어오고 이웃들이 약국 앞 세탁소 앞 수선집 앞에서 내려 오순도순 모두 라일락 속으로 들어오면 나는 기뻤다 그때 밤하늘은 여전해 신.. 2024. 2. 23.
잠깐 멈췄다 가야 해/류시화 잠깐 멈췄다 가야 해 류시화 '잠깐 멈췄다 가야 해. 내일은 이 꽃이 없을지도 모르거든.' 누군가 이렇게 적어서 보냈다. 내가 답했다. '잠깐 멈췄다 가야 해. 내일은 이 꽃 앞에 없을지도 모르거든.' 류시화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2024. 2. 5.